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초, 영어 수업 때였다.
팀끼리 특정 주제에 관한 마인드맵을 만드는 과제가 주어졌다. 모든 단어는 영어로 써야 했고, 나는 팀원들이 부르는 단어를 받아 적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본격적으로 이 악물고 수능을 준비하기에는 이른 시기였기에 내 영어 성적은 형편없었다. 팀원 중 하나가 ‘사이언스(Science)’를 불렀는데 갑자기 스펠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s’까지만 쓰고 버벅거리자 옆에 있던 남자애가 짜증을 내더니 내게서 종이와 펜을 빼앗아 갔다.
자존심이 상했다. 물론 그 애는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누군가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기에 나는 그때부터 필사적으로 영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방송되던 영어 듣기 연습도 꼬박꼬박 하고 쉬는 시간마다 단어장을 펼쳐서 단어를 외웠다. 어느 날은 반에서 항상 1등을 하던 남자애가 그런 날 격려하며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고 말할 정도였다. 엄마가 봤다면 ‘죽은 네 아빠가 딱 그리 독종이었지.’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이 사이언스 사건이 없었다면 언제 수능 영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을지 모르겠다. 나중에 가서는 나에게 짜증을 냈던 그 남자애에게 고마웠다.
수능이란 건 내 인생에 너무나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한다. 사이언스의 스펠링도 헷갈려 하던 열일곱의 내가 끈질기게 공부해서 성적을 올린 것처럼 어떤 서툰 일도 3년간 끈기 있게 반복하면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마치 자기 계발서 같은 희망찬 믿음이 생겼다.
하지만 세상일은 정량적인 연습만으로 쉽게 되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몇 년을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면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다. 멀티태스킹으로 뇌의 주의력을 떨어뜨리지 않는 이상 한번 마음에 걸린 일을 쉽게 떨치기가 힘들었다. 영어 단어야 외우고 외우면 된다지만 누군가와 싸우고 나서 금방 잊어버리거나 감정의 골을 메우지 않고 바로 없던 일인 척하는 건 연습부터가 불가능했다. 승부욕을 불태우기엔 측정되지 않는 능력인지라 이기고 진다는 개념을 끌어올 수도 없었다.
상사에게 못된 말을 들으면 그 상사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 고통받았다. 그 사람이 보낸 메신저 메시지를 퇴근길에 읽고 또 읽으며 이 사람은 대체 왜 말투가 이리 날카로울까, 왜 내 실수로 벌어지지 않은 일을 내 잘못이라고 몰아세울까… 쓸데없는 고민을 계속했다.
엄마랑 싸우면 난 왜 엄마랑 커뮤니케이션하기가 어려울까 고민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과 트러블이 생기면 대화를 복기하며 굳이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고 후회했다. 친구의 표정이 안 좋으면 혹시 내가 무슨 말실수를 했나 고민하느라 잠들지 못했다.
이미 벌어진 일에 관해, 무언가 명쾌한 해결책을 내고 이를 따르지도 않을 거면서 그저 돌아보기만 하는 버릇.
지나치게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에도 적절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방법을 알아낸다고 해도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확실히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향한 기대를 줄이는 것이 한 방법인 것 같다. 내가 상대를 생각하는 만큼 상대는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내가 고통스럽게 뒤를 돌아보며 울부짖는 상황은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다.
또 다른 방법은 그래도 결국 나는 아무 행위도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나간 대화를 회상하며 후회하거나 분노해도 나는 상대에게 이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세 번째 방법은 효과적인데 인간을 모두 빨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빨대끼리 부딪쳐서 뭐 하는가.
마지막으로 이런 내 마음을 먼저 알아주고 다가올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방법이 있다. 지나간 메신저를 읽고 속으로 누군가를 책망해 봤자 나보다 예민하거나 생각이 많은 사람은 흔히 없기에 어차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것…. 그럼 모든 것이 허무해지며 인생무상 상태가 된다.
혹자는 나이를 먹으면 자연히 해결될 거라고 말했다. 관심 대상이 나의 아이나 가족으로 확 좁아지면 신경이 가는 대상도 한정되기에 훨씬 나아질 거라고. 그 말도 일리가 있다. 과연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이런 상념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마음이 안정되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게 될까? 모든 것이 지금보다 훨씬 단순해져서 내 아이가 언제 어른이 될까, 나는 언제쯤 손주를 볼까, 그 손주가 언제 커서 결혼을 할까, 이런 것만 고민하는 시기가 올까? 그런 건가. 허무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람은 가족이란 공동체를 이루고 자손을 퍼뜨리는 건가. 그래서 DNA에 번식 본능이 새겨져 있는 건가.
퇴근길, 빌딩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와 횡단보도를 걸어가는 직장인들을 본다. 오늘도 열심히 살아 호흡하며 굉장한 일을 해내고 귀가하는 멋진 빨대 제군…. 분명 저녁으로 뭘 먹을까, 버스에서 앉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분명하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작은 커뮤니케이션이 있었지. 동료분이 업무 피드백을 해 줘서 내가 뭐라고 답했던 것 같은데 어땠더라. 혹시 예의 없게 답장한 건 아니겠지. 다시 읽어 볼까?
곰곰이 고민하며 휴대전화를 꺼내다가 잠시 입꼬리를 씰룩인 뒤 다시 가방에 넣었다. 뭘 또 신경 쓰고 있는 거야. 이렇게 조금씩 뒤돌아보지 않는 훈련을 한다. 쿨해지기 영역 1등급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