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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May 10. 2019

나는 또 먹겠지,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먹고살다’는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때 한 단어로 붙여 쓴다.


각각 다른 뜻을 가진 ‘먹다’와 ‘살다’가 ‘먹고살다’로 합쳐진 건 예부터 생을 이어 간다는 뜻으로 두 단어를 관용적으로 붙여 썼기 때문일 것이다.


자취하기 전에는 먹는 것에 그리 관심이 많지 않았다. 굳이 장 봐서 요리하지 않아도 굶을 일은 없었으니까. 자취를 시작하고서는 매번 끼니를 해결하는 게 너무 귀찮았다.


오늘은 또 뭐 먹지 고민하는 게 지겨워 집 앞 샐러드집 정액권을 끊어 놓고 매일 포장해 와서 먹자고 생각했다. 하루는 목살, 하루는 훈제 연어, 하루는 닭 가슴살, 하루는 구운 야채. 매번 토핑을 바꿔 먹었지만 인간은 풀때기만 먹고 살 수는 없는 존재였다.


곰이 100일간 쑥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된 건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건 기적이다. 인간이 된 것보다 확실히 그게 더 기적이다.


생존 전쟁은 이어졌다. 할 줄 아는 요리는 얼마 없고 고기는 비싸고 쌀은 떨어져 가고 냉장고엔 먹다 남은 애호박 덩어리뿐이었다. 3일 동안 애호박만 볶아 먹었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먹지 않을 채소인데… 갑자기 맛있어졌다.


내가 외식비를 아껴 돈을 절약하는 타입이라면 전에 사귀었던 한 남자 친구는 한 달 생활비의 대부분을 밖에서 맛있는 것을 먹는 데 썼다. 그는 오직 하루에 한 번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돈이 생기는 날이면 거창하게 맛있는 것을 사서 그때마다 “있을 때 아껴야지.”라고 다그쳐도 “웅!” 하고 안 바뀌었다.


어느 날은 그가 연어를 사 줬다. 연어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나에게 그는 “결혼하면 주말마다 연어 먹자.”라고 말했다. 그때 문득 이런 깨달음이 왔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 빌딩을 사고 건물주가 되어도 연어를 먹지 못하는 삶은 의미 없지 않을까?


야생 동물과 인간 사이의 공통점은 먹으며 생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인간도 동물이므로 먹는다는 것은 삶의 목표 그 자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본질적인 행위다. 아끼고 아껴도 어차피 건물주가 되지 못할 텐데, 하루라도 더 연어를 먹고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후 나는 그에게 있을 때 아끼라는 말을 하기가 망설여졌다.



나는 먹고산다는 것에 관해 생각했다.


불현듯 슬펐다. 어느 봄날 작은 편의점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던 한 남자아이가 떠올랐다.


작고 왜소한 아이는 엄마로 보이는 여자에게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여자는 그 애가 양이 많고 비싼 아이스크림을 고르자 거칠게 쏘아붙였다. “다 처먹지도 못할 거 뭘 이렇게 큰 걸 골라!” 여자는 아이의 정수리로 연신 욕을 퍼부었다. 아이는 아주 익숙하다는 듯 한마디 대꾸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양쪽 팔에 가득 용 문신을 한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이 아빠로 보이는 그는 험악한 목소리로 웬 소란이냐는 듯 두 사람에게 호통을 쳤다.


고작 양 많고 비싼 아이스크림을 집었다는 이유로 욕을 먹다니. 안타까운 녀석. 그 조그만 아이도 식탐이라는 게 있어서 오직 먹기 위해 부모의 욕을 감수했다. 그 애도 나름 치열하게 먹고살던 중이었던 거다. 나는 그 애에게 아이스크림을 배탈이 날 정도로 많이 사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나는 어떻게 먹고사는 중인가?


요즘 나 스스로를 관찰하며 느낀 점은 내가 너무 도식적인 일상을 보낸다는 거였다. 계획성이 너무 강하면 모든 것을 틀에 맞추려는 강박에 가까운 도식성을 갖게 되는 듯하다. 먹는 것, 사는 것, 자는 것, 일하는 것까지 착착 정해진 계획대로 하려고 애쓰다 보니 점점 자신을 억압하는 하루하루를 살아 내는 것 같았다. 무엇을 위해 이리 엄격하게 살아가는 건지. 고지식한 어느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엄마는 사람 한 명 먹고사는 데 그리 큰돈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세내고 밥 먹을 정도만 벌면 된다고. 100만 원, 200만 원 아까워서 그리 쩔쩔맬 필요가 없다 하였다.


언제는 나를 가만히 보더니 너는 회사에 다니지 말고 평생 동네에서 일하면서 자기랑 같이 살자고도 했다. 지금이야 엄마가 외로웠구나 하지 그때의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내가 미래에 아주 멋진 커리어 우먼이라도 될 줄 알았나 보다. 그런 얘기만 나오면 “에이, 서울 가서 살아야지.”, “그 일은 돈을 별로 못 벌잖아.” 했고 그때마다 엄마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사회생활이 전혀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나는 먹고사는 것 이상으로 무엇을 하려고 이렇게 악착같이 돈 모으기에 집착할까?


건강이 나빠질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그렇다기엔 미세 먼지 마스크 하나 사지 않았다.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치열하게 살아야 할까. 약속이라도 한 듯 매일같이 입에 밥을 넣어 생명을 유지하는 건 본능이니 그렇다 치지만, 다른 목적 없이 단순히 부를 축적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할 이유는 뭐란 말인가.


어느 날은 나와 전혀 상식이 안 맞는 한 주변 사람 때문에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포도막염이라는 눈병이 재발했다. 약 때문에 한쪽 눈의 홍채가 풀려 뭘 보는 게 어려웠다. 자연히 의욕도 떨어지고 일도 하기 싫었다. 일이 늦어질수록 눈치가 보이고, 또 그럴수록 스트레스받아 눈병이 안 나았다.


인생에 하등 중요하지 않은 사람 한 명에게 예민하게 얽매여 고군분투하는 사이, 어느 늦은 밤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몇 년 동안 오빠를 봐주시던 복지관 선생님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그분께 의지하던 엄마가 울면서 전화를 한 거였다. “너한테 해 준 것도 없는데 나도 이렇게 가 버리면 네가 과연 날 그리워할까?” 그 말에 울컥 슬픔이 차올랐다.


사람은 언제 갈지 모른다. 그래서 전철을 탔다. 오랜만에 도시를 사랑하고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곳에 내렸다.


젊은이들밖에 없는 서울 번화가 동네와 달리 경기도의 한적한 동네에는 아줌마, 아저씨가 많았다. 늘 시간이 멈춰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곳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조금씩 호흡하며 변하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간다니까 소고기를 사 왔다. 얇게 저민 소 등심을 프라이팬에 휙휙 구워 분주하게 날랐다. 나는 그곳에서도 먹었다. 좋은 고기를 먹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우리는 또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렇게 고기를 먹었다.


왜 이렇게 먹는다고 하는 것이 슬픈지, 왜 모든 것에 울컥 슬픔이 치미는지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냥 느껴졌다. 아직도 죽은 사람의 기운이 머무는 그 집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고기를 입에 넣는 우리. 오늘도 본능적으로 생을 영위해 버리고 삶이란 것의 본질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나. 그리고 내일도 어쩔 수 없이 지속될 나의 인생.


그렇게 해파리처럼 부유하며 변화하는 내 인생의 끝은 언제일까. 그것도 모르면서 나는 또 먹겠지.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찾으면서.


딱 숨 쉬고 살 만큼 먹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질 인생. 무얼 더 열심히 해야 하나?


주변에 나와 상식이 안 맞는 사람이 있든 말든 그가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왜 눈치를 봐야 할까? 그에게 외면받고 무시당해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이 새삼스럽고도 획기적인 발견에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고민이 순식간에 단순해지는 걸 느꼈다.


내게 모진 말을 하던 자건 친애하는 내 사람이건 모두 살기 위해 내일도 먹을 것이다. 그 단 하나의 행위. 이제 나는 어떤 인간을 만나든 그와 나 사이의 본질적인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배고파서 먹고 맛있어서 행복해하고. 생물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평등한 감각. 살아 내려고 먹이를 쫓아 초원을 달리는 포식자와 숨죽이며 흙탕물을 할짝거리는 초식 동물과 도시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 인간이 다를 게 뭐가 있는가?


그럼에도 인간은 늘 어딘가에 속하기 위해 애쓴다.


좁게는 가족에, 학교에, 회사에. 크게는 사회에, 주류에, 세상에. 우리는 우리를 형식적으로 정의하는 어떠한 집단에 속하기 위해 싫은 일을 하고 야단을 맞고 가면을 쓴다.


하지만 모두 똑같이 먹으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도처의 차별과 편 가르기, 급 나누기가 하찮게 느껴진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모두 인간인걸.


광화문에선 넥타이를 맨 아저씨들이 땀을 뻘뻘 흘려 가며 돼지국밥을 먹는다. 우리 집 앞 백반집에서는 근처 미용실에서 일하는 미용사 둘이 앉아 갈치조림을 먹는다. 아빠는 술을 마시고 들어와 라면을 끓여 밥까지 훌훌 다 말아 먹고 남산만 한 배를 한 채 코를 골며 잠든다. 엄마는 퇴근길에 전화해서는 넌 위가 안 좋으니 꼭 따뜻한 국물을 챙겨 먹으라고 당부한다.


다들 오늘도 살기 위해 입에 먹을 것을 넣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찌르르하다. 스트레스받을 때 무언가 먹고 싶다고 느끼는 것도 그만큼 좀 제대로 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러니까 먹는다는 건 왠지 슬프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이라도 버텨 내고 영위하려는 그 본능이 그저 가엾다. 그러니 치열하게 살지 말자. 먹고살 만큼만, 그 정도만 일하며 생각 없이 편하게 살아가자. 마음이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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