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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May 03. 2019

‘대화의 나르시시즘’을 조심하세요



지금은 나 스스로 감정 다스리는 법을 어느 정도 터득했지만, 한창 우울이 낯설 무렵 나에겐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했다.


처음 느껴 보는 좌절감, 무기력감, 절망감. 좋아하는 사람이나 친구 이야기는 잘만 하면서 내가 가진 진짜 고민은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려고 해도 어딘가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 들거나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은 연애나 우정보다 지루하고 무거운 소재였기 때문이리라.


용기를 꺼내 말해도 나와 상황이 완전히 같지 않은 사람에게는 100% 다가갈 수 없었다.


나를 철없고 나약한 인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나 자기 고통에 빠져 타인의 고통을 얕보는 자에게 이야기해 봤자 더 상처 입을 뿐이었다. 내 정신 상태를 완전히 오픈할 만큼 신뢰 가는 친구도 없었고, 남자 친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고, 설상가상 상담 센터의 상담자에게도 심한 말을 듣고 뛰쳐나오다시피 했으니 답이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잠시 묻어 두고 인간 심리를 진중히 다루는 영화를 보며 스스로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내 전공도 아닌 심리학 수업을 듣고,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강아지를 쓰다듬고, 잠들기 전 향초를 켠 뒤 글을 쓰는 것. 굳이 누군가의 기나긴 조언이 없어도 맘을 위로하는 것이 제법 많았다. 현실 세계의 조언들은 너무 뻔하거나 도리어 뼈아플 때가 있었기에 영상이나 텍스트로 위로받는 것으로 족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조언한다는 것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왜 타인에게 적절한 조언을 하는 것은 어려울까? 단순히 서로 가치관이 달라서? 인간은 어쨌거나 자기 안위가 가장 우선이기에 타인을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사람을 통해 구원받지 않던가.


왜 같은 고민을 이야기하는데도 사람마다 반응은 천차만별일까?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 줄 때 좋은 태도는 무엇이고 나쁜 태도는 무엇인가? 나는 그동안 다른 사람과 대화하며 겪어 온 난감한 경험을 토대로 세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나라면 안 그럴 텐데’의 함정


다른 사람의 고민에 조언할 때는 첫째, ‘나라면 안 그럴 텐데’의 함정을 조심해야 한다.


흔히 나라면 안 그래, 하며 상대방의 행동이나 생각에 핀잔을 주는 사람이 자주 보인다. 나는 나라면 ‘정말로’ 다르게 행동할 것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타인에게 충고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본인도 똑같은 상황이 되면 바보처럼 멍하니 있을지 모르는데 남한테만 똑바로 하라고 하는 건 내로남불과 다를 것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생각했던 것이 있다. 요즘 즐겨 보는 웹툰에서 한 커플에게 갈등이 생겼다. 남자 쪽은 기념일을 오해하여 여자에게 실망한 상태였고, 여자는 어느 순간 날카로워진 남자가 의아했다. 남자는 가족 관련 문제로 속에 응어리가 많이 쌓인 데다 여자보다 연봉이 적다. 그런 상태에서 스치듯 꺼낸 결혼 이야기에 여자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여 실망한다. 결국 별것도 아닌 일로 큰 소리를 낸다.


내가 주목한 건 댓글 창이었다. 독자들은 두 가지 인간 유형을 이야기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유형과, 이와 반대로 문제를 바로 해결하지 않고 묻거나 회피한 뒤 혼자 결론을 내리는 ‘회피형’. 댓글 창에는 회피형 인간은 피곤하니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바로바로 대화로 풀라는 의견이 많았다.


나는 왠지 그 모습이 우스웠는데, 그들의 의견이 틀려서가 아니라 살면서 문제를 그 자리에서 바로 풀기 위해 대화를 시도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을 만나 본 기억이 얼마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어쩌면 자기들은 잘 못 하지만 타인은 해 주었으면 하는 행동을 댓글이나 좋아요로 제시한 건 아닐까 추측했다. 감정은 표현하며 사는 게 좋다는 가치관을 가진 나조차 누군가와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바로 나서 본 기억이 많이 없다. 많은 경우 회피하거나, 갈등을 해결하고 관계를 이어 봤자 득 될 게 없을 것 같다고 판단해 다 접고 도망치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예전에는 답답하게 구는 친구가 있으면 도망치지 말고 맞서 보라고 충고했다면 요즘은 그러지 않는다. 나도 못 하는, 혹은 못 할 것 같은 일을 어떻게 타인에게 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게다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무턱대고 화를 쏟아 내다가 상처 주는 말을 내뱉는 건 그야말로 꼴불견이다. 적절한 회피는 내 감정을 차분히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가끔 필요하다.


‘나라면 안 그래’가 ‘나 같아도 그럴 것 같아’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인간관계의 난이도를 새삼 체감하고는 한다.




대화의 나르시시즘


타인에게 조언할 때 두 번째로 고려해야 할 점은 ‘대화의 나르시시즘(자기애)’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대화의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은 보스턴 대학의 사회학 교수 찰스 더버가 처음으로 발표했다. 흔히 누군가 고민을 이야기할 때 ‘나도 그래. 나는…’ 하는 식으로 은근슬쩍 자꾸만 자기 이야기로 넘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대화의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들이다. 상당히 피곤하고 말 걸기 싫은 유형이나, 생각해 보면 대다수의 사람이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어 간다.


이와 관련해 나는 영화 ‘소공녀’를 보면서 반성했다.


물질적으로는 빈곤하지만 마음만은 풍족한 주인공 미소는 잘 곳이 없어 노숙해야 할 판인데도 제 앞에서 우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 주며 말한다. “너 힘들구나.”, “같이 담배 한 대 피우자!” 그런데 친구 중 누군가가 미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는 장면은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미소는 오히려 내내 민폐처럼 그려진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참 무서웠다. 집 없는 사람도 ‘너’를 생각하는데 그들은 뭐가 부족해서 ‘나’를 말할까. 그건 그들이 미소보다 불행했기 때문이다.


자기 연민을 느끼는 자는 대화의 나르시시스트가 되기 쉽다.


어떤 대화에서도 무의식적으로 ‘근데 나는…’을 시전하는 자는 그만큼 관심이 필요한 사람이다. 고민을 들어 주는 사람도 어쨌든 사람이라서 관심받고 이해받고 싶어 하니까 섣불리 타박할 수는 없다.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만 주목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대화에도 양보가 필요한 법이다.


내 말에 묻어 있는 나르시시즘 여부를 떠나 나는 몇 년 전부터 대화의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를 피했다. 별거 아닌 듯 보여도 대화의 나르시시즘은 나를 우울증에 빠지게 할 정도로 강력했다. 아주 손쉽게, 단기간에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대화의 나르시시스트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악의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본인은 자기 말로 상대방을 위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악의가 없으며 본인이 자각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너는 참 기승전‘나’구나! 하며 핀잔을 주기도 뭐하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자각하지 않는 이상 버릇을 쉽게 고치지 못한다. 자각을 하고도 고치기 힘든 게 대화의 나르시시즘이다. 내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야지 다짐해도 정신을 차려 보면 ‘근데 나는…’이라 말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게 수차례 반복되면 간혹 실수를 하고 은연중 상대방을 실망시킨다. 한번 상대방이 대화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는 것을 실감하면 관계의 기반이 흔들리고 그러다 보면 외로움이 잘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두 가지를 마음에 아로새겼다. 우선 나에게 진지한 고민을 말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누가 더 힘든지 비교하는 남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관심이라는 것. 그들에게는 ‘아, 그랬구나. 너 되게 힘들었겠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처럼 ‘나’가 아니라 ‘너’가 들어간 말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마음에 새긴 건 상대방이 자기 말을 할 수 있게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 예컨대 이런 식이다.


너: 이제 그 친구들한테는 깊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나: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너: 점점 살아가는 환경이 달라서 공감대가 변하는 것 같아. 그 친구들은 서로 ○○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해도 안 되고 공감도 잘 안 가.
나: 그렇구나. 그럼 너가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어?
너: 음, A가 있고 B도 있고 또 C도 있고… D는 완전히는 아닌데 어느 정도는 돼.
나: 그 사람들한테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어?
너: 내가 좋아하는 △△나 □□에 관한 거?
나: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를 더 많이 만나야겠다.

     

위 대화에서 ‘나’는 ‘너’에게 맞장구를 치는 것과 동시에 넌지시 해결책까지 알려 준다. 물론 이런 대화는 아주 이상적이다. 나는 몇 차례 다짐해도 종내에는 조언이 아니라 설교나 자기소개를 해 대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래서 상담에 공부가 많이 필요하구나 싶었다.




진심과 우월감 구분하기     


타인에게 조언할 때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할 점은 내가 하려는 말에 따뜻한 진심과 공감이 담겼는지 알량한 우월감과 안도감이 담겼는지 구별하는 것이다. 전자는 조언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상처가 될지 모른다.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 내 공감을 이끌어 낸 글 하나가 있었다.


글쓴이는 ‘내향적이고 소심한 사람은 성격 쿨한 사람들이 조언하며 우월감을 느끼기에 아주 좋은 상대’라고 주장했다. 이어 누구나 다 아는 겉치레 같은 조언을 하며 ‘나는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에게 조언을 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흔히 혼자 있을 때 내면으로 자주 침잠하는 사람은 비교적 고민이 많은 편이다.


누가 보면 정말 쓸데없이 감정 낭비를 많이 하는구나 할 정도로 심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주로 듣는 말은 대개 ‘속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말을 해.’, ‘그냥 가볍게 생각해 봐.’ 등 일반적인 조언인데, 사실 이게 되면 고민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로봇처럼 쉽게 프로그래밍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상대방의 성향을 간과한 채 자신이 가진 기준과 배경만 따라서 조언하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직관이나 감정이 논리보다 발달한 사람은 상대방의 표정이나 말투에 드러나는 미묘한 변화를 직감적으로 캐치하고는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말로 나의 고민을 넘기고 금세 대화 주제를 바꿔 버리는 사람에게서 약간의 동정과 비웃음, 안도감, 우월감 등이 언뜻 비치면 자기 스스로가 무척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자신의 말이 상대방을 진심으로 걱정해서 건네는 말인지, ‘나는 이러지 않아서 다행이다.’, ‘얘보다는 내가 성격이 쿨하고 활발한 것 같아 다행이다.’라고 안심하며 답답한 상대방의 모습을 지적하고 개조하려는 말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혹자는 프로 불편러도 아니고 듣기 싫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애초에 고민을 안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 중 남에게 고민 상담을 하지 않고 살아갈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사회화된 동물로 평생 서로 상호 작용 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을 들어 주기도 하고 상담하기도 할 것이다.


이야기를 잘 들어 줄 때 상대방이 느끼는 고마움이 아주 큰 것처럼 고민을 받아 주지 않고 멋대로 조언했을 때 초래되는 슬픔도 상당히 크다. 우리는 누구나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말 한마디가 만들어 내는 위력을 생각했을 때 좋은 조언이란 훌륭하면서도 효율적인 심리적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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