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순이다.
집순이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여자를 일컫는다. 내가 언제부터 집순이처럼 살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마 초등학생 때부터인 것 같다. 나는 유년 시절 또래들과 밖에서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다. 집이 1년마다 이사를 다녀서 발 들인 초등학교만 다섯 개다. 자연스레 또래와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성향이 됐다. 그래서 집에서 혼자 게임을 하거나 문학 전집을 읽고 공상하거나 종이 접기 책을 보면서 색종이를 가지고 놀곤 했다.
중학생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취미를 들였다. 학교에 갔다 오면 모니터 앞에만 앉아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않을 때는 책상에 앉아 소설책을 읽거나 블로그에 흑역사를 제조하거나 꼬박꼬박 그림을 그렸다. 당시 내가 친하게 지낸 친구들은 모두 ‘덕후’였다. 그들도 나와 비슷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다 같이 논다 해도 누군가의 방에 모여 뒹굴뒹굴하거나 만화책을 보는 게 다였다.
성인이 된 나의 성격은 흔히 ‘인프제’라 불리는 INFJ형이다. I(Introversion, 내향), N(iNtuition, 직관), F(Feeling, 감정), J(Judging, 판단)가 모두 극단에 치우친다 스스로 느끼고, 몇 년째 요지부동이다.
이 유형의 일반적인 특성이 나를 무척이나 잘 설명해 주어서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소개하기 힘들 때 이 유형을 설명한 글을 보내곤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생각이 너무 많고 어떤 존재의 본질이나 의미를 과하게 고민한다. 세상만사 부조리에 몹시 예민하지만 다소 싫은 소리를 크게 못 내며, 즉흥적이고 활동적인 생활보다 안정감 있는 생활을 추구한다. 타인의 시선에 지나치게 민감해 사람과 부딪치는 것에 피곤해하고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비난을 잘 흘려 넘기지 못한다. 심리학과 관찰하기와 공상하기를 좋아하고 혼자 자아 성찰을 하며 침전하는 날이 많다.
인간에게 잘 상처받으면서도 인류애가 많은, 어떻게 하면 세상을 더 올바르게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하는 그런 성격. 보통 현실 감각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주로 듣는다.
한마디로 세상 살기 딱 피곤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끔은 내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센서티브’ 같은 희귀종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이불 밖의 위험을 쉽게 감지하는 탓에 바깥 생활을 하기가 피곤했다.
한때는 활발하고 외향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서 노력도 많이 해 봤다. 대학 새내기 때는 과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려고 하면서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친구들과 밴드 활동을 하면서 머리 색을 샛노랗게 빼거나 귀를 열 군데나 뚫기도 하고, 일부러 사람 많은 번화가에 혼자 나가 담력을 키워 보려고도 했다. 소심하고 약해 보이지 않으려고 입에 욕을 달고 살던 시기도 있었다.
그럴수록 내 본질과 멀어졌다. 내 본모습은 MT에 가는 게 두려워 경춘선 중간에 내려 쌀 봉지를 들고 다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쫄보일 뿐이었다.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는 우리 외삼촌은 “너는 회사를 다니면 안 될 타입이야. 프리랜서 같은 걸 해야 돼. 100%야.”라고 말했다.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시절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외삼촌을 만나 왔지만 외삼촌이 이렇게 통찰력 있는 사람인 줄은 처음 알았다.
확실히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할 나이가 됐을 때도 나중에 프리랜서로 일할 수 있는 직종만 골랐다. 사람과 자주 부대끼며 몸과 마음이 박박 갈리는 하드코어한 환경에서 일하는 게 진정 괴로워 퇴사만 두 번 했다. 결국 돈을 포기하고 근무 시간이 적으면서 사내 문화가 자유로운 회사로 이직했다.
이렇다 보니 피곤하게 살지 말고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을 다녀오고 남은 여가에는 역시 집에 누워 있다. 밝은 빛이 들어오는 게 싫어 일부러 창문 없는 두더지 굴 같은 자취방을 골랐다. 날도 밖에 안 나가도 되는 장마철과 한겨울이 제일 좋다. 이런 성향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잘 없다.
연애란 것도 사람과 친밀하게 관계하는 것이니 나에게는 먼 얘기나 다름없었다. 10대 때는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속으로만 좋아하고 그쳤다. 만약 사귀게 된다면 내 속사정과 비밀 같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할 텐데 그게 참 어렵고 두려웠다. 빛나는 사람 앞에 있으면 내가 너무 못생기고 초라해 보여서 창피했다. 꽤나 자존감이 낮아서 누가 날 좋아한다고 하면 진심으로 이해를 못 했다.
언제는 연인끼리 만나 데이트를 하는 게 무척 신기했다. 어떻게 빛나는 사람 앞에 앉아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실 수 있단 말인가? 열아홉, 내 인생의 첫 데이트 때 당시 남자 친구가 나에게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자고 했지만, 도저히 그 애 앞에서 밥을 먹을 수가 없어 결국 같이 굶었다.
어느덧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이성과 단둘이 식사하기에 성공했다. 그 행위가 어색해서 장렬하게 체했지만. 메뉴는 아라비아따 스파게티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어쩔 수 없는지라 20대 초반 몇 번 연애를 하고 헤어지길 반복했다. 전 남자 친구들과 다툰 이유는 내 민감한 성격과 그들의 둔한 성격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스무 살 때부터 2년간 사귀었던 남자 친구는 나랑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하긴 했지만 간혹 차가웠다. 그 당시 우울증이 와서 낯선 감정에 많이 힘들었는데 그 애는 내가 겪은 힘든 일들이 별것도 아니라는 듯 굴었다. “너보다 힘든 사람 많아. 잠이나 자.”라는, 나 같은 사람에게 치명타와도 같은 말을 서슴지 않았다.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옆에 있어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를 사랑한댔다. 나와 애정 표현의 방식이 너무 달랐다.
이후 사귀었던 남자 친구는 우울이라는 감정 자체를 모르는 애였다. 그 애는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우울해 본 적이 없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당연히 성격이 잘 맞을 리 없었다. 섬세하지 못했고, 심하게 말하면 좀 바보 같았다. 활동적인 걸 좋아해서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친구였다. 그래도 나를 좋아해 주고 나도 좋아서 계속 사귀었는데… 그 애는 어느 날 어려운 내 성격이 귀찮다며 날 차 버렸다. 그 애가 군대를 전역하고 한 달도 안 되었을 시점이었다.
너무 좋아했는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이처럼 연애에 연달아 실패한 나는 더 내면의 자아에 몰두하고 필연적인 우울과 대인 기피로 인간사에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 누구보다 진심 어린 깊은 관계를 원하지만 정들다 마는 게 싫어 차라리 벽을 치고 의심을 자주 했다. 거기다 툭하면 아팠다.
나가고는 싶지만 나가기 싫어. 사람이 싫지만 사람을 만나고 싶어. 모순적인 마음과의 갈등이 지겨워질 무렵,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영상물에 더욱 심취했더니 집순이 기질이 점점 강해져 20대 중반에 이르러 만렙 집순이가 되었다.
내가 만렙 집순이라니. 나는 내가 과연 또다시 연애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사람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게 있는데 나에게는 그게 수학이랑 연애인 것 같았다. 누군가와 관계가 깊어지기 위해 다시 똑같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게 성가셨다. 혹시 싸우기라도 해서 안정적인 정서가 뒤틀리는 걸 견디기도 싫었다. 어차피 헤어지게 된다면 모든 게 의미 없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고, 내 성향을 받아 주고 이해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데이트하러 나가는 게 귀찮았다.
얼마나 귀찮았냐면, 울 정도였다. 언제는 여름에 데이트하러 씻고 옷을 입고 나가려는데 너무 덥고 귀찮아서 울었다. 결국 지하철로 몇 정거장 안 되는 거리를 택시를 타고 갔다. 남자 친구 입장에서는 ‘쟤는 나를 사랑하기는 할까.’라는 생각이 들 법도 했다. 하지만 막상 나가면 엄청 잘 놀고 이야기도 많이 했다. 그냥 나는 귀찮아서 울 정도로 집을 떠나고 싶지 않은 집순이일 뿐이다.
솔로일 때 나가고 싶을 때만 나가고 놀고 싶을 때만 놀러 가서 행복했다. 꾸준히 외로움을 느끼고 누군가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지만 침대에 누워 미드를 볼 때는 그저 행복했다. 그러다 그다음 남자 친구를 만났다.
그는 보노보노급 초식남으로 나와 성격과 데이트 취향이 거의 비슷해 충돌한 적이 없었다. 서로 연락도 잘 안 하고 귀찮게 구는 걸 안 좋아했다. 비상시엔 “급함!” 등의 메시지를 날려야 연락이 됐다.
대신 만나면 대화를 아주 오래 했다. 데이트를 하면서 서서히 깊은 얘기를 나누며 친해졌다. 데이트할 때마다 “이제 1% 더 친해졌네요.”라고 말했다. 사귀고 한 달이 될 때까지도 어색했던 것 같다. 그는 그걸 기다려 줬다.
편해지고 나니 좋았다. 피차 집순이, 집돌이이므로 둘 다 집에서 편하게 있을 때의 모습을 일찌감치 들켰다. 안경 낀 모습이 너무 못생겨 보이고 싫어서 눈병이 나도 어떻게든 렌즈를 끼고 다니던 내가 그의 앞에서 편하게 안경을 끼는 걸 보고 가끔은 너무 편한가 싶어 흠칫하기도 했다.
같은 동네에 살아서 데이트는 거의 동네에서 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데이트하지 않았다. 일단 가기로 한 곳에서 식사를 다 마치면 나는 곧바로 집에 들어가고 싶어 했는데, 그럴 때면 그는 한번 집에 들어가면 다시 데리고 나오기 힘드니까 나왔을 때 이것저것 다 해야 한다며 디저트를 먹자거나 장 볼 거 있지 않냐고 하거나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본인도 집돌이면서 어떻게든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애처로워서 결국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갔다.
이와 같은 연애 경험을 거치고 단단히 깨달았다. 무조건 성향이 맞거나 날 이해해 줄 정도로 착한 사람을 만나자고. 이러나저러나 실패한다면,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차라리 잘 맞는 쪽과 만나 사귈 때라도 편하게 지내는 게 좋다고.
우울한 집순이는 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도 누워 있는 걸 좋아한다. 뭐 하냐는 물음에 뭉개진 목소리로 “누워 이써.”라고 말하는 것 말고는 딱히 풍부한 대답을 할 수 없다.
만약 여자 친구가 집순이라면 누워 있는 것과 비등하게 좋아하는 게 먹는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활동적인 데이트를 제안하는 것보다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꾀어내는 것이 제일 좋다. 이곳저곳 자주 옮기는 것보다 마음에 드는 장소에 오래 머물며 진지한 대화를 많이 나누는 게 좋은 것 같다. 그동안 열심히 누워 있었냐고 물어보면 신나서 고개를 끄덕일 거고 무슨 드라마나 책을 봤는지 물어봐도 좋다.
나의 경우 말수가 없고 헛소리를 자주 해도 좋아하는 것과 관련된 소재에는 할 말이 많은데, 혹시 듣는 사람이 지루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할까 봐 대부분 말하기를 망설인다. 그래서 상대방이 내가 좋아하는 것에 관한 질문을 많이 해 주면 신이 난다.
카페나 술집도 잘 가는 곳만 간다. 주인과 안면을 트면 몇 시간을 있어도 편해서 좋다. ‘당 떨어진다’는 표현처럼 ‘사회성 떨어진다’고 느끼면 급속도로 버거워하는 듯 보이는데 이때가 집에 갈 타이밍이다.
혼자 사는 집순이의 경우 드라마 ‘호타루의 빛’에 나오는 아메미야 호타루처럼 맥주를 잔뜩 사 가거나 그냥 나란히 누워서 같이 뒹굴뒹굴해 주기만 해도 세상 행복해할 것이다. 만약 혼자 사는 집에 집순이를 데리고 올 경우 누워 있을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둔다면 최고의 애인이 될 수 있다. 같이 요리를 해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술판을 벌이는 것도 좋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좋다. 우울해 보이면 맛있는 걸 먹이고 누워서 이야기만 잘 들어 줘도 효과적이다.
데이트 빈도는 많아야 일주일에 두 번이다. 생리하기 전처럼 평소보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시기에는 일주일에 한 번도 나가기 싫을 때가 있다. 수용 가능한 빈도를 넘으면 데이트가 의무적으로 느껴지고, 그럼 의미를 잃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이런 성향에 잘 안 맞는 상대, 특히 시시때때로 집착하는 상대와는 서로 힘들지 모른다.
‘밖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왜 집에만 있으려고 해?’, ‘나가서 운동이라도 하면 기분이 밝아질 거야.’ 등의 말은 삼가는 것이 좋다. 집순이들은 집에서도 할 일이 너무 많다. 예를 들면 미드 보기, 책 읽기, 빨래하기, 청소하기, 인터넷으로 예쁜 거 구경하기, 끄적거리며 자아 성찰하기, 요리 해 먹기, 벽지 무늬 관찰하기, 방 꾸미기, SNS 하기, 유튜브 보기, 음악 발굴하기, 반려동물과 놀기, 누워 있기를 초월한 누우우우우워 있기 등. 다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다. 너무 많아서 하루 만에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밖에 나갈 시간이 없다.
집순이 중에서는 아마 운동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햇볕은 출퇴근하면서 쬐는 걸로 충분하다. 가고 싶은 술집, 보고 싶은 영화나 전시회가 있으면 먼저 같이 가자고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집순이들이 데이트 말고 집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해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집순이들은 집에만 있는 행위도 유익하다는 걸 당신이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고마워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같이 하고 싶어 하는 게 있다면 당연히 해 주고 싶어 한다. 집순이도 놀 때는 아주 잘 논다. 한번 놀 때는 제대로 놀기 위해 작정하기도 한다. 다만 평소에도 활동적으로 바뀌라고 강요하지는 않는 게 좋다. 서로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조금 웃기고 억지스러울지 모르지만 모든 계획을 길게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집순이 여자 친구와 멀리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면, 당장 다음 달을 기대하진 말고 ‘아, 적어도 1년 안에는 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우울한 집순이(이하 집돌이 포함)를 대변하고 싶었다.
커 오면서 “젊은 애가 뭐만 하면 다 귀찮대.” 하는 말을 틈만 나면 들었다. 어디 놀러 좀 나가라거나 너무 집에만 있으니까 더 우울한 거 아니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가면 더 우울해지는 걸 어떡하나. 내 자아실현은 집에서 이루어진다.
요즘에야 집순이 이미지가 캐릭터화되고 나쁘지 않게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집에만 있고 사회 활동을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을 ‘내성적인 인간’, ‘소심하고 음침한 인간’으로 낙인찍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우울한 만렙 집순이여도 연애를 할 수 있었던 건 내 삶의 방식과 성향을 숨기지 않고 어필한 덕분 그리고 그 점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람을 만난 덕분이다.
물론 가장 설레는 연애 초기 때의 상대방은 내가 어떤 성격이고 무슨 행동을 하든 다 존중해 줄 것처럼 말한다. 그러다 서로 안 맞는 부분이 생길수록 이전의 다짐은 다 잊은 듯 행동한다.
초반부터 선을 딱 그어 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는 집순이니까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누워 있는 걸 뭐라고 하지 말아 줬으면 해.’ 의기소침해할 필요가 없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성향인 거니까. 강하게 어필하면 언젠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누워 있는 것을 세상 가장 가치 있는 행위라 여기는 상대가….
다들 우울한 집순이가 된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혼자만의 시간이 누구보다 많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흔히 몇몇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보통 수준의 사회 활동 빈도를 일반화하듯 정해 놓고 그걸 정답처럼 당연시한다. 하지만 집순이에게는 집순이만의 당연한 기준이 존재한다. 감히 누가 서로의 방식과 기준을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