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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Apr 26. 2019

당신도 ‘호모 센서티브’입니까?

호모 센서티브 자가 진단 테스트



몇만 년 전의 지구에는 적어도 여섯 종의 인간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상한 점은 옛날에 여러 종이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딱 한 종만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 사실은 우리 종의 범죄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관용은 사피엔스의 특징이 아니다. 현대의 경우를 보아도 사피엔스 집단은 피부색이나 언어, 종교의 작은 차이만으로도 곧잘 다른 집단을 몰살하지 않는가.
원시의 사피엔스라고 해서 자신들과 전혀 다른 인간 종에게 이보다 더 관용적이었을까?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마주친 결과는 틀림없이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심각한 인종 청소였을 것이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어렸을 적, 나는 보통의 남자애들이 좋았다.


외모에 끌렸거나 연애하고 싶어서 좋았던 게 아니라 그들이 가진 무심하고 바보 같은 태평함이 신기해서 좋았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자칭 아주 예민한 아이였는데 선생님의 말 한마디, 친구들의 미묘한 눈빛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 몇몇 남자애는 선생님께 혼이 나든 누가 저에게 욕을 하든 그냥 흘려 넘기고 잊어버리는 게 신기했다. 심지어 그들은 서로 욕을 하고 때리며 친해졌다. 몹시도 미지의 존재였다. 그럴 수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는 가족을 포함해 집안 친척 중 나처럼 내향적이고 예민하며 사사건건 의미를 부여해 스스로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혼란스러웠다. 나처럼 자주 우울해하는 사람도 없고 생각이 많아 혼자만의 시간이 늘 필요한 사람도 없어 보였다. 그나마 상성이 맞는다 느낀 사람은 이모부였는데 그리 가까운 친척이 아니라 자주 볼 수 없었다.


아빠는 어릴 때 엄마랑 이혼해서 집에 없었고, 후에 홀로 세상을 떴다. 아빠에 관한 나의 기억은 전무하다. 함께한 추억이 얼마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빠는 다운 증후군이라 여섯 살 이후로는 대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생활이 고단했던 엄마는 나의 정신적인 성장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엄마는 별것도 아닌 고민을 자주 하는 나에게 성격이 참 특이하다, 쓸데없는 고민이 너무 많다 등의 말을 했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정말 내가 이상한 아이인 것 같았다.


별로 대화가 잘되지 않았고 그 경험들이 고통스러워 어차피 이해받지 못할 거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나로 인해 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무언가를 말했을 때 상대방이 귀담아듣지 않는 걸 보는 게 참 싫었고, ‘그건 네가 잘못한 거야.’ 같은 말을 듣는 게 무서웠다.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일단 참으면 상처받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서 학교에서 담임한테 따귀를 맞아도, 길에서 성기를 드러내고 주물럭거리며 말을 거는 아저씨를 만나도, 같은 반 남자애에게 머리를 맞고 발로 배를 걷어차여도 아무 일도 없는 척했다.


머리로는 이 모든 게 너무나 이상하고 옳지 않은 일이란 걸 알았는데, 달리 말할 곳이 없으니 속으로 앓기만 했다. 가족에게 고민 상담을 하고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친구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친구들과도 진심으로 어울리기 힘들었다. 학창 시절 친했던 친구들이야 있지만 마음이 완벽히 이어졌던 친구가 있었냐 하면 잘 모르겠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과거의 편린 속 나는 늘 혼자거나,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자주 동떨어진 기분을 느끼는 꽤나 신경질적인 아이였다.


일단 첫인상부터 문제였다. 나는 키가 작고 실제 나이에 비해 많이 어려 보이는 외모를 가졌다. 이야기를 해 보면 생각하는 게 그들과 똑같거나 애늙은이 같다는 평을 많이 듣는데 입을 다물면 가끔 상대가 나를 만만히 대하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진지하게 말해도 전하려는 무게의 절반밖에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무례한 대우를 자주 겪다 보니 늘 ‘저 사람도 내 외모만 보고 날 깔보겠지.’ 하는 피해의식이 자동으로 뇌리에 탑재됐다. 다시 태어난다면 비욘세로 태어나고 싶었다. 콤플렉스 때문에 쌀쌀맞게 다녔더니 어느 순간 시크한 콘셉트가 되어 있었다.


문화 취향이 맞는 친구도 거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지 않거나 내가 재미있게 본 책과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 나만 아는 이야기를 할 순 없었다. 내가 가진 고민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 나를 드러낼 수 없었다. 그렇게 사람과의 대화가 언제나 재밌을 수만은 없다는 걸 깨달아 갔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첫 남자 친구와의 연애 이야기를 할 친구가 없어서 꽤나 외롭고 답답했다. 그 애와 몇 달 사귀고 헤어져 침대에서 펑펑 울 때까지 룸메이트들은 내가 진지한 연애를 하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공부도 힘든데 인간관계에까지 힘들이고 싶지 않아 생각 없이 다녔더니 간혹 나를 바보 취급 하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굉장히 소심하고 쪼잔해서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막 대한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다 기억한다.


성인이 되어서는 여러 사람과 사귀고 멀어지고를 반복했다.


친해져도 각자의 사정으로 금세 멀어지는 게 안타까워 끝까지 나와 이어질 사람이라 판단되지 않으면 곁을 내주고 싶지 않았다. 20대 중반으로 넘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자주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니 오히려 편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식견을 넓히는 경험이 필요하다 생각은 하지만 전보다 부쩍 다가가기 망설여졌다. 결국 예나 지금이나 외로운 건 똑같다.



세상에는 유독 남들보다 예민하고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이 있다.


나에게는 힘든데 남들에겐 아무렇지 않은 일이 너무 많기에 그들은 주변 사람에게 잘 이해받지 못한다. 나만 이런 걸까? 내가 잘못된 걸까? 이렇게 생각하는 빈도가 많아 자연히 우울해지고 소수가 되기 쉽다.


특히 어린 시절 가족의 무조건적 지지 혹은 풍부한 자원과 함께 자라지 못한 내향적·감정적인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이해받을 장소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지 못해 더욱 내면으로 파고들게 된다. 가족과 성향이 충돌하면 집과 사회 어디에서도 편할 수 없으며, 부담 갖지 않고 꿈과 감성을 펼칠 자본 없이 밑바닥부터 생계를 꾸려야 할 경우 마음이 소진되어도 멈추지 않고 바깥에서 노동을 해야 한다.


안팎으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면 화살의 방향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방문을 닫고, 세상 밖으로 쉬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꿈, 예컨대 절대적인 평화와 친절, 아름다운 배려가 넘치는 이상적인 세상은 픽션 안에나 등장한다. 마치 눈에는 보이지만 잡히진 않는 뜬구름과 같다. 곧 현실의 인간 사회는 또 하나의 야생임을 체감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최대한 자신을 이해하고 정신적인 지지자가 되어 주는 동료다. 그런 역할을 해 줄 가족, 애인, 친구를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확실히 감정적 동요를 쉽게 받지 않는 사람에 비해 사회 안에 섞여 살아가기 힘들다. 정신적 생존, 즉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 내기가 비교적 어려운 것이다.


세상은 우울하면 약을 먹고 상담을 받고 이겨 내라고, 그저 밖으로 나가 용기를 갖고 살아가라 한다. 하지만 상투적이고 정석 같은 조언에 밖을 나갔다가, 결국 또 상처받고 돌아와 무기력하게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나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폭력적인 환경과 여러 차례 부딪힐수록 우울은 심화되고 타인이 점점 더 무서워진다. 그럴수록 진짜 나를 이해하고 알아주는 사람과의 진정성 있는 대화가 그리워진다. 하지만 이해받지 못할까 쉽게 마음을 열 수 없는 경우가 반복된다.


사람들은 나에게 “너는 참 강한 아이구나.”라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떻게 버텨 냈는지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보이는 면만 보고 판단했다.


내가 손에 넣은 것은 다 참고 구르고 깨지면서 얻은 것인데 그걸 모르는 사람은 단편적인 면만 보고 나에 관한 정의를 내렸다. 어느 순간 나는 외유내강에 시크하고 야무진 인간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다. 나는 외유내유에다 센서티브하고 흐물흐물하다. 아주 나약하고 쉽게 힘들어하는 인간일 뿐이다.


정말이지 타인과 대화하고 깊은 관계를 맺고 나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일에 본능적으로 서툰 것 같다.


상대가 가진 추악하거나 이기적인 면모 등에 민감해서 내가 상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집요하게 파악하려고 한다. 옳지 않은 건 바로잡아야 하고 나를 질책하거나 비난하는 소리를 견디질 못한다.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되어 친하게 지내다가 그 사람의 무례한 면을 보는 게 힘들고, 그것 때문에 멀어지는 것도 남들보다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책이나 영화나 드라마나 게임 같은 것에 빠져들면서 늘 현실과 조금은 거리를 두면서 살아간다.


그러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는 책을 읽었다. 사피엔스를 읽으면 오늘날 사서 고생하고 스트레스받는 인간 사회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있다.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잔혹함과 이기심이 사실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의 본질적인 특성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인간도 개나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그저 동물의 한 종이다. 단순한 사실이지만 객관적인 눈으로 들여다보니 그렇게 새로울 수 없었다.


지구를 지배하는 최고 종족으로 자리매김한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와 정체를 알게 된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호모 사피엔스 속에 제대로 섞이지 못하는 나는 사실 뭔가 다른 종족이지 않을까? 그들의 공동체 속에 자연스레 어울리면서도 항상 그들에게 화가 나고 이질감을 느끼는 나는 사실 생물학적으로 약간 그들과 다른 특성을 가진 게 아닐까?


나는 물리적으로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아도 때때로 사람으로 인해 불안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나처럼 ‘예민한’ 사람들이 사실은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자로 군림하기 위해 무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 없다고 판단해 버린 자들의 성격을 아주 조금씩 물려받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그냥 돌연변이거나.


그리하여 전설과도 같은 가설을 세워 보기로 했다. 호모 사피엔스가 점령한 지구에 사실은 예전부터 ‘호모 센서티브’라는 희귀종이 섞여 살아가고 있다는 설.


그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이룩한 현대 사회에 은밀하게 숨어 있다. 그중 일종의 각성을 거쳐 ‘호모 베리베리 센서티브’가 된 자도 있지만 드물다. 호모 센서티브는 호모 사피엔스가 우울증, 대인 기피증 등이라 일컫는 증세를 생물학적으로 내재한다. 대부분의 호모 센서티브는 자기가 호모 사피엔스인 줄 알고 살아간다. 심지어 그들은 동족도 알아보지 못해 간혹 서로를 공격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가설을 세우고 나니 내가 사회 속에서 생활하며 느끼는 시시콜콜한 예민함이 이상하고 특이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내 종족의 특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딱히 고칠 필요가 없으며, 어쩌면 예민하지 않은 호모 사피엔스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일지 모른다고. 그러니 자책하고 자조하기보다 그 능력을 자랑스러워하며 더 가꿔 바람직하게 활용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고.


이렇게 자존감을 회복한 나는 스스로 호모 센서티브설을 맹신하게 되었다…. 나는 분명 나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중에는 우리가 가진 이 예민함을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


호모 센서티브는 예민한 덕분에 타인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좀 더 빨리 캐치한다. 따라서 남들보다 배려하는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또한 옳고 그름을 더 잘 판단할 수 있고, 자기 성찰을 많이 하여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올곧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나에게 맞는 인간상과 그렇지 않은 인간상을 쉽게 가려내니 좀 더 진실하고 밀도 있는 인간관계를 꾸려 갈 수도 있다.


물론 세상의 부조리에 민감하게 노출되어 머리 아픈 날이 많겠지만, 그렇기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생각해 보니 예민하다는 건 단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으니 인간은 더 입체적이고 신비로운 존재 아니겠는가?





믿거나 말거나,

호모 센서티브 자가 진단 테스트


1.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혹은 날씨 좋은 날은 나와 하등 관계가 없다.

2. 친구라고 부를 사람이 거의 없다. 있어도 그들과 점점 멀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3. 혼자 있는 게 가장 편하다.

4. 책이나 영상물을 보며 인생 배우기를 좋아한다.

5. 대화보다 글이나 그림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게 더 쉽다.

6. 싸우기 싫어서 나쁜 말을 듣거나 할 말이 있어도 참는다.

7. 사람 없는 카페의 구석 자리가 내 전용석이다.

8.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을까?’라고 종종 생각한다.

9. 다소 염세적이고 비관적이다.

10. 누군가를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는 것도 중범죄다.

11. 비교적 눈치가 빠르며 통찰력이 있다.

12.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현상은 섬뜩하고 안타깝다.

13. 성격이 특이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14. 자기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냉정해질 때가 있다.

15. 가끔 호모 사피엔스보다 다른 동물과 더 잘 통한다.

16. 마음에 상처 입는 것이 싫어 종종 외로움을 감수한다.

17. 직감적으로 안 맞는 사람과의 만남은 피한다.

18. 상대의 기분에만 맞춰 장기간 지내 본 적 있다.

19. 카멜레온 같은 처세술에 능하다.

20. 예민한 내가 싫지만 가끔은 좋다.

21. 우울증, 대인 기피증 등으로 불리는 증세가 익숙하다.

22. 사람을 구경하거나 관찰하는 것을 즐긴다.

23. 어떤 관계에 심각한 싫증을 느끼면 아예 연락을 끊는다.

24. 나에게는 심각해 보이는 누군가의 인성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안 보이는 것 같아 의아했던 적 있다.

25. 종교, 신화, 점술 등 비현실적인 것에 흥미를 느낀 적 있다.

26. ‘말해 봤자 뭐 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27. 세상 살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것 같다.

28.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했을 때 이해받지 못한 적이 많다.

29. 가끔 편의점이나 대중교통 등에서 사람들을 볼 때 이유 없이 짠하거나 울컥한다.

30. 이 테스트를 끝까지 했다.



결과


0개: 흥미로운 존재.

1~5개: 호모 사피엔스 중에서도 무심한 편?

6~10개: 평범한 호모 사피엔스 범주.

11~15개: 마음속에 잠재된 센서티브한 본능을 깨달을 단계.

16~20개: 호모 센서티브로 각성!

21~25개: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26~30개: 동족이여. 지구는 척박하나 포기하지 말고 생존합시다. 달리 갈 데도 없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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