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함에서 오는 즐거움
저는 어릴 때부터 상당히 통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외가 넘쳐나는 생명과학을 전공하면서도, 이거 아니면 저거 세상을 엄청나게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던 사람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사실 삶을 살아가는 매 순간들이 고통스러웠어요. 통제할 수 없다는 것과 불확실한 미래가 너무 견디기 힘들었어요. 잘 되지 못하면 안 될 것이니까요. 잘 안되어도 괜찮아 그런 건 저에게 없었거든요.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니 그나마 조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시작했던 것이 분단위로 쪼개진 계획표 만들기였어요. 칸칸이 짜인 시간표를 보니까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근데 또 이게 문제가, 갑자기 발생하는 이벤트들로 일정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하면은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힘들어지는 게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상태로 20년 가까이를 보내왔어요.
그러다 계획, 통제 그런 거 없이도 행복한 남편을 만나 오면서 마음을 조금씩 고쳐먹었습니다. 아니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세분화된 계획보다는 큰 목표덩어리들을 만들기. 두루뭉술하게 결과를 기록해 보기. 같은 일들을 먼저 실천해 봤어요. 계획을 세우지 않는 건 엄청나게 불안한 일이니까 이 정도까지는 해보자 하면서요. 너무 세세하게 살아온 탓에 한 발짝 떨어져서 제 삶의 타임라인을 본다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 불안함이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확실하지 않은 미래 덕분에 자꾸만 현실의 저를 채찍질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전 확실한 엔딩이 좋거든요.. 영화도 책도 모든 것들은 다 마지막 스포를 당하고서 보는 걸 참 좋아합니다. 그래야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에 마음이 덜 동해서 에너지를 아낄 수 있거든요. 다들 그게 뭐냐고 하던데 저에게는 이게 제일 행복한 일이에요. 확실한 엔딩을 미리 알고 보는 주인공의 삶. (가끔 제 엔딩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남편을 만나고 많이 내려놓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것저것 통제하는 마음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매번 긴장되고 무서웠거든요. 내가 이만큼 노력했는데 갑자기 잘 안되면 어쩌지? 갑자기 어그러지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항상 자리했습니다. 아마도 브런치 글 중에 어그러지고 어그러지면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그 순간이 매일이었다고 생각하시면 편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뜬금없이 그 불확실함이 조금 즐겁습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최종적으로 운이 따라줘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느낀 이후부터는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어떻게 가더라도 내가 가려는 목표가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된다 라는 생각이 저를 바꿔주었습니다. 혹시 모르잖아. 잘될지도 모르잖아. 엄청 잘될지도 모르잖아? 갑자기 짱이 될 수도 있잖아?! 혹시 안된다면? 다른 거 하면 되잖아!! 뭐 어뗘!! 일어나지 않았지만 성공을 잘되기를 상상하는 순간이 요즘은 참 즐겁습니다. 그래서 자꾸 뭘 더 하게 되는 것도 있고요.
사실 이런 마음들이 없었으면 아마도 답이 정해져 있는 곳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서 누군가의 밑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정기적으로 벌어오는 삶. 그렇게 안정된 것을 추구하는 삶으로요. 오늘의 이야기가 욕심쟁이 태그를 달게 된 것도 여기에서 시작된 거예요. 혹시 잘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그랬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모여 혹시 모르니 일단 다 해보는 요즘의 제가 되었거든요.
사실 이 불확실함과 '혹시'를 즐기고 있는 저를 보면 많이 새롭고 신기합니다. 아마도 지난 1년간 차곡차곡 쌓아 온 혹시 몰라서 진행한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런치도 혹시 몰라서 쓰는 거거든요? 혹시 모르잖아요. 미래의 누군가, 또 겁 없이 욕심만 한가득 머금은 채로 괜찮게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와서 아등바등 대며 제 글을 보게 될지. 그리고 왠지 모를 안심을, 약간의 희망을 만나게 될지요. 그래서 저는 혹시 모르니 계속 무언가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으니까요.
혹시 모르잖아요? 진짜 잘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