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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근 Nov 29. 2017

추방이요? 제가 한번 당해보겠습니다 - 2

영주권 분투기


Act 4. 추방의 두려움


정부가 지능적 안티인 것 같다


항소심은 작은 재판이다.  따라서 변호사를 고용 할 수 있다. 법적 대리인을 고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내 소송을 스스로 변호한다는 뜻이다. 법정 근처에도 안 가본 내가 혼자 항소심 준비를 하려니 까마득했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


21세기 현대인이라면 막막할 때 정보의 파도를 좀 탈 줄 알아야 한다. 인터넷 서핑으로 모은 정보에 따르면 요즘 스스로를 변호하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법이나 법률 용어, 재판 절차를 모르는 사람이 변호인으로 법정에 서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정보를 얻기 쉬워지면서 변호사 자문료를 감당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직접 변호인으로서 재판에 서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을 스스로를 대표하는 소송자 Self-Represented Litigant, 줄여서 SRL 이라 부른다. 북미에는 이런 경우가 많으며 법조계 비종사자를 위한 자료도 풍부하다.




나는 우선 캐나다 정부 웹사이트에서 항소심에 관련된 정보를 찾아 읽었다. 점점이 글자로 빼곡한 정부 웹사이트는 간단한 정보 찾는 일도 힘들게 만드는 마법의 공간이었다. 접근하기 쉽도록 고심한 흔적이 보이지만 말 그대로 흔적뿐이다. 백성을 어엿삐여기는 마음을 가진 자여, 링크를 남발한다고 해서 원하는 정보에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캐나다 이민국 웹사이트를 도시에 비하자면 분명 중구난방 지어진 구식 도시다. 어디로 이어지는지 도통 모를 기다란 링크명이 복잡하게 연결된 모습이다. 영어 못하는 이민자들 상대로 이쯤 되면 지능적 안티가 아닌가?


야생의 밀림같이 비협조적인 정부 던전을 깊은 빡침을 동력 삼아 돌파했다. 이민법과 항소심 과정에 관한 정보를 획득했다(!). 내가 어째서 추방을 당한 것인지, 항소심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는지,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큰 그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번 확인했듯 나의 경우 영주권 연장을 위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도적 고려 조항 Humanitarian and Compassionate cause, H&C 만이 유일하게 판을 뒤집을 수 있다.



Act 5. 자문과 자료수집

담을 넘는 전사


우리 가족 법조계 네트워크는 가뭄이다. 성실한 아버지와 정이 많은 엄마 덕에 '먹을'복이 주렁주렁 열린 친구 밭은 풍년이지만. 부모님은 나와 같이 법에는 문외한이요, 시민권과 영주권을 가지고 있어도 여전히 적응 중인 이민자 신분이니 마음이 닳아도 없는 자원이 땅에서 솟아날 일이 없다. 한인 단체는 이민 정착이 주 업무인지라 영주권자가 추방된 사례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가장 먼저, 그리고 유일하게 떠오른 사람은 미국에서 지낼 때 도움을 많이 주셨던 한 전도사님이었다. 청년부 일을 하시면서 동시에 대학교에서 한국 정부지원 직업 연수 프로그램을 총괄하시던 내 세계의 유일한 ‘사회인 어른’이다. 대학생 때 행동하기보다는 꿈속에 머물기 좋아했던 나에게 전도사님은 넓은 세상을 구경할 수 있는 작은 문이었다.




대학 시절, 내 주변 사람들은 학생 신분을 크게 두 가지로 사용했다. 학교라는 제도를 발판 삼아 이것저것 사회의 맛을 보기 좋아하는 대외활동 그룹이 있다. 반대로 아직은 사회인이 아니다는 특성에 더 의미를 두고 싶어 하며 사회의 찬바람 쐬기를 지연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람 잘날 없는 세상 풍파를 맞이하기 전에 대학이라는 담벼락 안에서 자기 계발에 힘쓰려는 심산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학구열 높은 타입보다는 불안정 애착 유형에 더 가까웠다. 이불 밖은 위험했다. 학교 바짓가랑이를 꼭 붙잡고 세상 탐험을 미루었다. 전도사님은 그런 내 마음속에도 새로운 경험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다. '누가 시켜만 준다면...'이라는 전제와 제약이 철컹철컹 발목 잡던 그 마음이었다.


내가 지쳐서 징징댈 때 전도사님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웃픈 말보다는 더 먼 곳을 보며 살자는 격려를 해 주었다. 교회에서나 일터에서나 다른 이를 섬기려 노력하는 전도사님 모습은 치열해 보여서 나는 전도사님 보단 전사님이라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긴 민망해 약간 발음을 달리하여 '전솨님~'이라고 부른다. 먼 곳을 향해 가는 사람은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추방이 되건 말건, 나는 이번 일을 기회삼아 내 지경을 넓힐 것이었다. 불끈! 믿는 바를 삶에 우려내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마음과 몸에 이로운 약효 있는 차 한잔 끓여낼 줄 알게 될까. 캡처해서 고이 모셔둔 카톡대화와 함께 '전솨님'은 다시 한번 담벼락을 넘어야 할 나의 발에 힘을 실어주셨다.


돈봉투를 대신한 스벅 카드


나는 한 유학 컨설턴트 대표님을 소개받았고 이를 통해 그 회사 소속의 법무사님과 연락이 닿게 되었다. 그분은 정말 감사하게도 자문료를 받지 않고 상담을 해 주셨다. 먼저 국가에서 보낸 항소심 관련 문서들과 내 신분, 그리고 거주 이력에 대한 설명을 훑어보셨다.


"상황이 좋지는 않네요. 문서화된 행적 및 신분 상태에 반론의 여지가 많아요. 재판에서는 확인 가능한 정보만을 사실로 인정하죠. 따라서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정황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소자는 당신을 불리한 상황으로 이끄는 게 목적이에요. 어떤 반론을 펼칠지 예상해야 해요. 그에 상응하는 자료를 제시하지 않으면 어떤 주장이든 법정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복잡한 법의 고리망에서 나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얼추 예상하고, 불리한 진술을 효과적으로 물리칠 시나리오를 짜 놓아야 한다. 전문가의 식견이 필요했다. 법무사님은 몇 가지 중요한 반론의 여지를 짚어주고, 어떤 논리로 나를 지킬지 큰 가닥을 잡아주셨다. 그러면서 변호인 없이 스스로 이 과정을 준비할 경우 판을 뒤집을 확률이 많아도 반반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또 자료조사에 관한 두 가지 조언을 얻었다. 첫 번째는 재판을 참관해 보는 일이다. 항소심은 이민국 방에서 약식으로 치러지지만 재판의 분위기를 익혀두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로 나와 비슷한 경우에 승소한 재판기록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캐나다에서는 상부 판결이 법적 효력을 가지기 때문에 나에게 유리한 자료로 사용할 수 있다. 이는 CanLII Canadian Legal Information Institute 에서 누구나 찾아볼 수 있다. 거듭 감사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기 전, 비루한 오십 불짜리 스타벅스 카드를 건넬 수밖에 없었던 나의 손이 떨렸다.


법정에서 배려를 생각하다


차가운 시선이 난무하는 법정을 상상하며 인간의 소통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는 상대의 본심을 알 수 없기에 입에서 나오는 말을 진실이라 믿을 수밖에 없다. 내뱉어진 정황과 미세한 차이들을 인식하며 상대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린다. 실체가 아닌 인상에 불과한 그 모습은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바뀐다. 진실한 말을 한다 해도 표현의 한계와 듣는 이의 해석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왜곡되기 마련이다. 특히 이해관계에 얽힌 이들의 소통은 그 간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정에서는 큰 범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자료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친다.


하지만 자료가 허락하는 시야는 퍽 좁다. 자료와 자료 사이의 간격을 메우고 있는 누군가의 의도와 사정은 아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그 틈을 줄이기 위해 더 치밀하게 자료를 모으는 것이다. 특히 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소통이라면 더 촘촘한 벽이 필요하다.


관계를 더 풍요롭게 가꾸기 위해서도 소통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운다. 신경 써서 짓기만 한다면 소통을 위한 작은 장치들은 나와 너를 잇는 튼튼한 징검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상대방의 관점에서 궁금해할 사항을 먼저 이야기해 준다거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사정 설명을 붙이는 일은 상대방의 노동을 덜어준다. 너와 나 사이 간격을 줄이고자 조금이라도 애쓰는 걸 배려라고 하나 보다.


- 영주권 분투기 3편으로 이어집니다.



영주권 분투기 1편

영주권 분투기 3편 (마지막)


글, 그림 상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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