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근 Nov 24. 2018

추방이요? 제가 한번 당해보겠습니다 - 3

영주권 분투기 마지막편


Act 6. 결전의 날


나에게 사회 인맥은 없지만, 친구들과 지인이 있다. 그들의 도움이 빛을 발했다. 항소의 핵심이 인도적 고려 조항이기에 캐나다에서 만난 사람들의 지지 편지에도 큰 의미가 있다. 시간을 들여 이민국에 편지를 쓰고, 신분증명서 사본까지 동봉해야 하는 거추장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분이 빼곡히 적힌 편지를 보내주셨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 쓴 한국어 초안을 친구가 번역해 주기도 하였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그 감회가 다시 느껴져 눈시울이 붉어진다. 사람은 간사해서 이런 고마운 일을 잘도 잊는구나. 캐나다에 감사의 빚을 졌다. 평생 세금 열심히 내며 갚으리…!


도움이 안 될 것 같던 동생은 CanLII에서 키워드 검색으로 나와 비슷한 사례를 여러 개 찾아주었다. 이미 추방을 당하고 또 항소심을 거쳐 간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했다. 그러나 거절된 판례도 적지 않았다. 역시 캐나다는 내가 깎아내렸던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관심 없이 굴던 옛 애인이 막상 헤어지고 나자 울며 매달리는 꼴이다. 최선을 다해 질척거려주마. 나머지는 캐나다의 결정권자 마음이다. 나와 대면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호의를 얻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캐나다의 재판소 풍경


날짜가 다가오는 동안 나와 동생은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지방 법원에서 열린 여러 가지 재판에 참관했다. 그곳 분위기는 하나같이 엄숙하다 못해 성스러웠다. 사람들은 재판장을 '존경하는 재판장님' Your Honor 이라고 부르며 마치 왕 앞에 있는 것 같이 행동했다. 형식과 분위기로 판사를 향한 경외심을 유도하고 그의 결정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과정으로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공간에는 다양한 사람이 존재했다. 마약사범과 그 보호자, 강도죄로 수갑을 찬 십 대들과 가족·친지들이었다. 판사는 주로 엄했지만, 피고인들에게도 매우 정중하고 때로는 따뜻하기까지 해서 나는 놀랐다. 재판장은 법적 대리인 없이 스스로 변호하는 사람을 위해 일반인에게 익숙하지 않을 법한 용어나 절차를 설명해 주고, 재판의 분위기에 압도되지 않도록 격려하기도 했다. 형사 소송에서는 검사와 변호사 사이의 기싸움도 보였다. 어떤 검사는 피고인에게 반론할 때 꽤 빈정댔다. 보기 안 좋았다. 나는 항소심 때 상대방의 의견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항소심이 열리기 몇 주 전 당일 사용될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양측이 상대방 자료를 미리 읽어볼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정말 필요한 경우 추가 자료를 제출할 수도 있다. 내 자료의 양은 많았다. 무엇이 필요할지 선별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성의라도 보이자는 심정이었다. 며칠 후, 상대편의 자료를 담은 봉투가 왔다. 비로소 재판이 실감 났다. 기소자가 정말 있구나…. 이건 나를 추방하기 위해 그쪽이 모은 자료구나…. 바짝 긴장했다. 머리로는 초조한 줄을 몰랐는데, 날짜가 다가올수록 소화가 잘 안 되고 잠을 설쳤다. 준비의 일환으로 커뮤니케이션 책을 몇 권 읽고, 거기서 나온 대로 스크립트를 짰다. 큰 틀을 먼저 이야기하고, 세세한 사실을 근거로 내 주장을 다지는 식이었다. 가족 앞에서 말하기 연습을 하며 여러 밤을 보냈다.


결전의 날


그리고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가족이 항소심이 열리는 이민국으로 따라갈까 말까 작은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은 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나는 사실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밖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작은 여행 가방을 끌며 걸어오는 사람은 분명 캐나다 국경 감시대 Canada Border Services Agency, CBSA 대리인이었다. 회색인지 옅은 금발인지 알 수 없는 머리카락이 한껏 구불진, 아주머니인지 할머니인지 구분이 안 가는 사람이었다. 하늘색 카디건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 정장을 입었다. 법률보다는 행정 업무에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대적하는 이상한 자리이기에,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그저 잘해보자는 의미로 악수를 청했다. 기소자는 놀라는 눈치였다. 예상치 못한 나의 행동에 경계하는 표정으로 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나도 당황했다. 이,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나. 아무래도 깔끔하게 감정이 배제된 관계는 못 되겠다.



아니나 다를까, 재판 실엔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싸움을 할 모양이다. 상황을 금세 파악했지만, 가슴이 뛰었다. 내 멘탈은 이중 삼중으로 만들어져 있어 약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유리 설탕으로 만들어져 있단 말이다아. 역시 무른 태도로 사람을 대하면 얕잡아 보이게 된다. 웃으며 악수를 먼저 청함으로써 상대의 호승심에 힘을 실어준 모양이다.


항소심이 진행될 방안은 간소한 재판장 같았다. 나의 항소를 맡을 소송 관련 의원은 영상을 통해 재판을 볼 예정이다. 적의를 풍기는 사람과 단둘이 있게 되어 더 떨렸다. 이내 스크린에 의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난 곳 없이 둥근 곡선으로 이루어진 얼굴이었다. 어깨까지 구불구불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이 퍽 순한 인상을 풍겼다.





항소심이 시작되고 나는 발언을 시작했다.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자 옆에 앉은 기소자는 들으란 듯 한숨을 쉬거나 한심하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부러 저러는 거야. 나를 당황하게 해 실수하게 만들려고. 방청했던 재판을 떠올린다. 예의를 갖추고 상대편의 반론을 듣는 검사나 변호사가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저건 상대의 감정을 흩뜨려 놓는 전략일 수 있다. 그렇게까지 치졸해져야 하나 싶었지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할 말을 모두 마쳤다. 곧이어 기소자의 반론이 시작되었고, 나는 바쁘게 손을 놀려 노트를 채웠다. 무슨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나를 추방하는 일이 목표인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잡아 두어야 했다.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지나가 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상대방의 주장을 대충 알아들은 나는 반박할 자료를 꺼내 들었다.


내가 캐나다에 살 의향이 있음을 증명할 자료는 캐나다와 미국 땅을 오갈 때 찍힌 몇몇 날짜뿐이었다. 캐나다에서 추방당하기 전, 이미 이곳에서 학교에 다닐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 등 몇 가지 타이밍을 입증하는 일이 중요했다. 단순한 숫자 나열은 나의 의도에 따른 행적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모자랐다. 그래서 한눈에 들어오는 시각 자료를 만들어서 제출했다. 캐나다에 체류한 기간과 미국에 체류한 기간을 각각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표시하고, 그 사이 중요한 사건을 시간순으로 배치해 놓았다. 지난 몇 년간 나의 자취를 정리한 연표였다.


이 자료는 전도사님이 소개해 주신 법무사님과 면담을 할 때도 보여드렸다. 법무사님은 이런 것들은 도움이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인 나에게 도움이 되는 자료였고,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다른 누군가에게도 그러할 것으로 생각해서 자료 목록에 첨부했다.


"이게 대체 뭡니까?"


나의 연표를 본 기소자는 질색했다. 법정 분위기를 모르는 사람이 어울리지 않는 것을 들고 왔다는 눈치였다. 사실 알록달록한 시각 자료는 교대를 다닐 때 배운 전략이다. 정보처리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은 청각, 촉각, 시각 등 여러 가지 매체로 지식을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소통의 방식을 여러 갈래로 나누는 것이다. 이 중에 네 뇌가 마음에 들어하는 놈 하나쯤 있겠지- 여러 매체에서 통용하는 바로 그 전략이다. 법정 또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이기에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비록 저 아줌마는 날 어리숙한 사람으로 보고 있지만.


나는 꿋꿋이 시간표를 토대로 반론을 시작했다. 의원님과 기소자의 질문이 여러 차례 오가는 동안, 천덕꾸러기 시간표는 모두에게 쓸모 있는 자료가 되어갔다. 일전 법무사님도 통하지 않는 자료라고 하시면서도 시간표를 참조하여 대화를 이어갔는데,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나는 속으로 콧바람을 뿡뿡 뀌었다.

이 순간 내 마음속에 어떤 묵직한 확신 하나가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나 시스템이 이전의 형식과는 다른 생소한 방식이라 꺼린다고 해도, 결국에는 사람 사는 세상은 비슷한 논리로 돌아가기에 내 선택을 조금쯤은 믿어도 된다는 거였다. 이후 내가 흔들리는 일이 생길 때, 나를 잡아주는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실상 내 목소리는 시종일관 떨렸고 소리도 콩알만 해서 몇 번이나 크게 말해달라는 주의를 받았다. 의원님은 법적 지식이 부족한 나에게 여러 가지를 설명해 주었고, 내 질문에도 친절하게 대답해 주셨다. 애초에 똑똑한 변론으로 상대를 찍어 누를 능력은 없다. 열심을 보이는 게 목표였다. 나는 내가 준비해 온 항목을 전부 다룰 수 있어 만족했다. 기소자 아주머니의 말도 귀 기울여 듣고 할 수 있는 만큼 대답했다. 나는 무시는 당해도 똑같이 대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달아오른 얼굴에, 심장에 붙은 불이 내장까지 번지는 듯했다. 뇌는 항소심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반쯤 익어버려 제 기능을 못 한 지 오래다.


"항소가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너무 낙심 말아요."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기소자 아주머니가 휙 돌아서기 전 한 마디를 던졌다. 조금은 누그러진 말투였다. 함께 등장했던 캐리어를 돌돌 끌며 사라지는 뒷모습. 자기가 질 거라는 암시는 하기 싫어서 저렇게 얘기하다니, 은근 츤데레 아니야? 나에게 격려 또는 위로 한 조각을 주려는 의도일 거라 혼자 상상하며 웃는다. 싸움은 싫으니까. 캐나다 구성원으로서 자격 미달인 사람을 추방하는 게 저 사람 일이다.


크고 엄숙했던 법정. 그 딱딱하고 형식적인 분위기에 겁을 먹기도 했지만 결국 판단의 몫은 사람, 사람에게 있다. 이제는 내 손을 떠난 일.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밖에서 기다리던 가족이 우르르 몰려왔다. 발갛게 상기된 내 얼굴을 보고 일단 끝났으니 축하하자며 서둘러 이민국을 빠져나간다. 서늘한 초봄 공기가 뜨거운 볼에 닿았다. 석판 같은 빌딩 사이사이로 오렌지빛 석양이 섞인다. 아, 시원하다.





그리고...


영주권 분투기 1편

영주권 분투기 2편


글, 그림 상은리

 Instagram   그림    일상 나눔 

이전 06화 추방이요? 제가 한번 당해보겠습니다 -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