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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근 Oct 08. 2020

07 굳이 (새이)

초짜 서른, 두 여자의 글쓰기 프로젝트 <무쓸모임>

따로 쓰는 글감



친하게 지내던 A가 멀쩡하게 잘 살다가
어떤 일이 있고 나서 꼴불견이 되었다.



몇 번을 뒤척여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다. 그럴 때면 자연스레 지난 며칠을 머릿속으로 되돌려보곤 한다. 갓 지나간 오늘의 기억부터 더듬어 사람들과의 대화를 복기해본다. 가장 먼저 A와의 대화가 기억이 났다.


친하게 지내던 A가 멀쩡하게 잘 살다가 어떤 일이 있고 나서 꼴불견이 되었다. 그 모습이 영 눈에 거슬려 벼르고 있던 내가 오늘 기어이 이야기를 꺼내고 만 것이다. 그 전부터 평소에 불편한 감정을 딱히 숨기지 않았던 탓에 A는 이미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알고 있었던 듯했다. 빙빙 돌리는 법 없이 안면에 말을 갔다 박아버리는 나는 이번에도 뾰족한 말들을 직구로 던져댔다. A는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만의 구름 속에 얼굴을 파묻고 두발을 있는 힘껏 땅 위로 띄우고 있었는데, 그런 사람의 발목을 잡아 땅에 못 박아 버리고 눈앞의 구름을 훠이훠이 걷어버리는 내가 아주 불편했을 것이다. A는 처음에는 나를 설득해보려고 하다가, 변명을 둘러대 보기도 했다가, 결국엔 들은 척하고 끝내기로 한 것 같았다. 그렇게 대화가 찝찝하게 끝이 났다. 


이불을 발로 콱 차버렸다. 아, 내가 머 하자고 그런 말들을 했지. 지가 정신이 빠지든 뭘 하든 내가 뭔 상관이야. 굳이 필요 없는 기회를 만들어서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하는 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평화를 희생하면서까지 나는 왜 이런 짓을 하는가. 


부들거림을 멈추고 좀 더 전으로 시간을 돌려보기로 한다. 며칠 전에 선배 변호사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일 이야기를 하다가 범위가 점점 넓어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저녁이었다. 몇 달 전에 일하던 나이 어린 클라이언트 파일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내가 말했다. “그래도 나는 선배가 남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할 때 다른 변호사랑 다르다고 느껴요”. 


그 사건은 법률 지원으로 들어온 파일이었는데 이런저런 좀도둑질을 하는 아이가 클라이언트였다. 감옥에 들어가 있어서 오도 가도 못하는 애가 선배변호사에게 허구한 날 전화해서는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부탁하는데, 선배는 자기가 왜 그런 걸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은 하면서도 매번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굳이 왜 저렇게까지 하지 싶었는데, 법률지원은 돈을 정말 짜게 주기 때문에 일을 최소한으로 하는 게 관례이기 때문이다. 돈을 지원해주지 않는 법률 관련 일도 많은 판에 개인적 심부름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나에게 선배는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사실 그 애가 자기 나라로 소환되기 전에 내가 준비한 게 있었어. 큰 가방을 하나 사서, 거기에 성경책 하나랑 책 하나, 옷 몇 개, 간식들을 잔뜩 넣어서 보내주었어. 걔가 그곳에서는 좀도둑질을 멈추고 새로운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네” 선배가 (그때는 나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그 이야기를 해줄 때 그 사람만의 빛이 나며, ‘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었지’ 싶었다. 




평소에는 잘 모른다. 내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 그 안에서 살면서 행동하고, 말한다. 그러다가 ‘굳이’ 무언가를 할 때가 있다. 굳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나의 편안함에서 한 조각을 떼어내겠다는 행동이다. 안락한 나만의 공간에서 나와서 남과 껍질을 비비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맞닿은 곳의 껍질이 벗겨지는 아픔을 감수하겠다는 것인데, 그때서야 진정한 내 속살이 드러난다. 굳이 내가 했던 말과 행동에서 외면하고 있던 나의 진짜 모습들이 나오고, 상대편을 향한 속마음이 나오고, 내 신념의 위치가 드러난다. 


그래서 굳이 무언가 하는 사람을 잘 봐야 한다. 동시에 굳이 무언가를 하는 법이 없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종종 굳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렇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속사람을 자주 확인해줘야 한다. 그렇게 내가 걸어가는 길을 좌우로 살펴야 한다. 물론 실망할 때도 있고, 나처럼 한밤중에 이불을 콱 차버릴 때도 있다. 하지만 빛이 보일 때도 있다. 내가 믿는다고 생각했던 걸 내가 정말 믿고 있었구나!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땐 이번처럼 잠 못 드는 밤, 다음 날을 기다릴 힘이 생긴다.



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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