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짜 서른, 두 여자의 글쓰기 프로젝트 <무쓸모임>
사람들은 나보고 일찍 철이 들었다고 했다.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었던 시절, 하나님은 계속 나를 나무에 비했다. 처음 봤던 나무는 환한 빛에 싸인 거목이었다. 누가 봐도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나는 감격했다. 내 훗날 많은 사람을 품는 자애로운 나무가 되리라. 험난한 세월을 앞둔 씨앗 나부랭이가 한 말이었다.
사람들은 나보고 일찍 철이 들었다고 했다. 그 말 역시 나무에 어울린다 생각했다. 새순이 자라 어느 정도 나무의 형상이 되면 그 모습 그대로 크기만 커지지 않던가. 나는 비리비리 키만 늘어난 어린나무라도 모양을 갖추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점잖게 자리를 지키느라 따분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데 피해 의식을 느낀 건 다음이다. 깡충깡충 귀엽게 나돌아다니는 토끼나 제 맘대로 재잘대는 새와 나는 다른 종류였다. 속았다. 제 나이 때 한창 그러고 다니는 애들이 부러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체질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다들 집에 갔는데 나만 무언가에 붙들려 나머지 숙제를 하는 기분이랄까. 외롭고 괴로웠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많은 생물에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큰 나무를 보여주시며 나를 감질나게 했다.
언제는 룸메이트와 크게 싸웠다. 겉으로는 별스럽지 않은 일이었지만 내가 지금까지 쌓아 온 좋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아정체성이 무너지는 계기여서 크게 혼란스러웠다. 그때 왜 그렇게 모든 게 견딜 수 없었는지, 나는 한 시간 반 떨어진 교회 새벽기도에 나와 있었다. 그것도 강대상 바로 앞에. 목사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이 자에게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담대한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내 차례가 되어 목사님이 뱉은 첫 마디는, 이 나무가 겨울을 지나고 있다는 말이었다. 온 마음이 불타는 것 같았다. 나무는 빨리 자라지 않건만 나는 두려움이 조급함으로 나타나는 사람이라 낙담도 곧잘 했다. 그런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주신 게 나무의 정체성이었다.
가족과 사는 일은 묵직하게 견뎌야 할 풍파와 같았다. 쓴 뿌리에서 난 찬 기운이 마음을 할퀴는 기분은 오랜만에 본가에 온 오늘까지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들과 한집에 부대끼며 사느라 난 생채기를 하나님 안에서 치유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웅크리고 자라느라 몽땅한 나무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불안하기도 했지만 견디는 일은 나무의 숙명이 분명했다. 내가 고집스럽게 지켜내야 할 게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견디라고 하셨을까.
나는 모든 이를 품는 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자아를 잠자코 죽이는 법을 익혔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성질을 부릴 때면 엄마를 측은하게 여길 수 있을 때까지 이해하려 애썼다. 동생이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하거나 넋두리하면 온 세상 희망을 다 가진 사람처럼 고고하게 행동했다. 아빠에게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힘듦을 털어놓는 술친구였는데, 나는 주로 아빠가 아내에게서 원했지만 듣지 못하는 인정의 말을 해 주었다. 나는 이런 직위를 수행하며 보람을 느끼기도 했지만, 껍데기에 갇혀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 인간성의 일부를 포기하고 얻는 고상함 같은 거였다. 가끔은 내가 뭘 원하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돌아보면 내 가족에게도 나 고유한 사람을 알아가고 사귈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 말하길, 하나님이 원하는 걸 연기하는 걸 믿음이라고 부른댔다. 연기나 롤플레잉에는 가지지 않은 걸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속성이 있기에. 그렇지만 역할에 맞는 내가 되려 하면 할수록 정말 변하지 않는 무언가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져버릴 수 없다. 내 앞에서 은혜로운 말로 충고하는, 존경해야 마땅할 형제자매를 보다가 일순 그 사람의 고유함이 사라지고 어떤 한 존재에 편입되어버린 듯한 이질감을 느낄 때가 있다. 나 자신에게서 느끼는 불편함과 비슷하다.
내가 나무로 살았던 시절이 지금 내가 가는 방향에 어떤 의미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 시간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나에 대해 했던 말을 빌려 쓰자면 ‘그릇이 커지는’ 경험이었다. 동시에 정말로 변하지 않는 걸 가지고 싶다는 갈망이 커지는 시기였다. 내가 내가 되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나도 될 방법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정체성을 붙잡고 싶지만 힘겹게 견디는 시절 느꼈던 동질감은 잠시 떠나있다. 이 고민이 나무의 성장 과정인지 아니면 다른 것이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