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짜 서른, 두 여자의 글쓰기 프로젝트 <무쓸모임>
맞닿음은 이런 카타르시스를 불러온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E.T.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아담과 신 그리고 E.T. 와 소년 엘리엇의 손가락 끝이 맞닿는 순간을 회상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하이파이브해도 될 일을 그들은 어째서 손가락을 사용하는 걸까? 상대의 손가락 끝이라는 작은 면적에 내 손끝을 포개는 일은 굉장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웬만한 의지가 없고서야 취하기 어려운 자세다. 손가락 하이파이브는 절 중에 최고봉, 물구나무 서서 하는 그랜절의 의의와 같을 것이다. 두 장면이 각 작품의 클라이맥스를 일궈내기에 손색이 없는 이유는 두 세계의 의미심장한 연결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클라이맥스란 갈등과 무질서로 꽉 찬 불안정한 상태의 최고조에서 봇물이 터지듯 강한 해소가 일어나는 지점이다. 불안정한 에너지가 안정을 향해 흘러가는 거센 움직임이다. 맞닿음은 이런 카타르시스를 불러온다. 여러 현상과 의미와 의도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해 헤매다가 일순 모든 것이 퍼즐처럼 들어맞는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이 찰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수가 있고, 아무 생각 없이 나누던 대화에서 내가 붙잡고 있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도 한다. 의미 있는 연결이 일어날 때, 불편함을 유발했던 요소들은 질서를 찾아 비로소 정리되고 소화된다.
나는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나 이 세 가지에 접점이 생길 때 가장 큰 맞닿음의 해소가 일어난다. 나의 어떠함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세계관에 걸맞지 않다고 느껴지면 갈등이 생긴다. 불편한 감정과 생각은 쌓여 가는데 그것들을 내 마음 어디에 정리해야 할지 알 수 없고, 버려야 할지 간직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거나 생소한 문제에 맞닥뜨릴 때다. 숨쉬기 힘들만큼 여유가 없어지면, 괴로움에 어떻게든 해소할 구멍을 찾는다. 간간이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 오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인고하며 보낼 수밖에 없다. 내가 마주하는 삶의 모습과 그것이 일으키는 감정, 그리고 동떨어진 의지가 들어맞는 순간을 기다린다. 억지로 맞닿으려고 손가락을 중구난방 내지르면 내 손가락만 아플 때가 많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일수록 함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이런 시간을 피할 수 없다. 가끔은 이 구조가 억울해서 마치 고질병 같다고 불평하다가도, 약간 하나님 눈치를 보며 (하나님은 좋은 분이니까) 훈련이라고 고쳐 부른다.
그리스도인의 맞닿음은 통상 정의하는 카타르시스와 결이 다르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논리의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닌, 믿음이라는 공간의 확장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나'라는 좁은 틀에 욱여넣은 상태에 하나님의 좋으심을 인정할 때, 좁은 틀이 빵 하고 무너지며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 논리와는 다른, 신비한 하나님의 질서와 의미를 기다릴 여유와 희망이 생기는 세계다. 하나님과 맞닿은 세계에서 나는 자란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빵 빵 계속 엉성한 팡파르가 울렸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