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근 Sep 20. 2020

04 찬양 (생근)

초짜 서른, 두 여자의 글쓰기 프로젝트 <무쓸모임>





와, 쟤 왜 저러냐 슬픔이한테. 재수 없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나는 천성이 우울하다.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어릴  밖에 나가 노는 것보다 집에서 혼자 있는걸 좋아했고, 말수가 적었고 감정표현이 크지 않았다. 무던해 보이는 나였지만 슬픔 만큼엔 예민했던  같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주인공 라일리의 행동을 이끄는 감정은 기쁨이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기쁨이가 탐탁지 않았다. 확신에 찬 독선 앞에서 앞에서 나는 뒤틀린 심령을 감출 수가 없다.


“와, 쟤 왜 저러냐 슬픔이한테. 재수 없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영화를 같이 보던 친구에게 말했다. 놀랍게도 친구는 호응해주지 않았다. 기쁨이가 뭘 잘못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슬픔이에게 한층 더 이입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나(슬픔이)는 점점 억울해졌다. 그러다 라일리가 저녁 식탁에서 부모님과 말싸움을 벌이는 장면에서 엄마의 머릿속이 나왔다. 그곳에서는 슬픔이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어찌나 마음이 편해지던지! 마치 내가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슬픔이 중요한 사람도 있지. 사람마다 희로애락 중 유독 민감한 감정이 있기 마련이므로, 사회가 종용하듯 기쁨이 큰 사람이 우월한 건 아니다.


피지에 살던 시절, 나는 다른 존재와의 연결점이 모두 끊어졌다는 다소 과장되고 중2다운 슬픔에 빠져 있었다. 엄마는 가족 문제를 고쳐 보겠다고 여자 혼자 살기에는 위험한 오지에 애 둘을 데리고 갔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생은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며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말 한마디 안 하다 집에 와서 밤에 한국에 두고 온 친구들 꿈을 꿨다고 울기 일쑤였다. 내가 힘들다고 얘기하면 엄마는 자신이 더 힘들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지만 당시 나는 그 일을 계기로 부모님의 최우선이 자녀인 내가 아니라 본인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아냈다. 가장 끈끈하다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유사시에는 깨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충격이었다. 그건 진리의 일면이기는 했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으리라고 섣불리 믿어버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틋한 감정이란 죄다 위선이고 거짓이라는 중2다운 발상이었다. 그 세계관이 십 대 나에게 지운 외로움과 슬픔은 아주 컸다.


우리 집에 목사님의 발걸음이 잦아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누구의 말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가장 처음 들었던 감정은 감사였다. 꼭 내 곁이 아니어도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해 주신다니 고마웠다. 어설픈 진리가 남긴 자국은 여전히 강렬했지만,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무거운 슬픔을 녹여 없앴다.


 피지를 떠나 캐나다에 정착하고 나서도 슬픔은 꾸준히 쌓였다. 씻지 않으면 피부와 머리카락에 기름기가 더해지는 것 같이 슬픔은 내가 무슨 일을 맞닥뜨리면 자연스럽게 생성하는 감정이었다. 학창 시절에 정말 슬플 일이 많았던 건지, 아니면 내가 없는 슬픔도 찾아내서 슬퍼하는 심성인 건지 구분을 못 하겠다. 어쨌든 나는 매주 금요일 기도회에서 한 주간 착실히 모은 슬픔을 씻어내지 않으면 아팠다. 말 그대로 가슴 부분이 찬바람 지나는 것처럼 싸하고 쿡쿡 쑤셨다. 기도할 때는 속 썩이는 자식을 둔 엄마처럼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쳤다.


금요 기도회에 가면 가족과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성령의 불금을 보냈다. 자정이 넘도록 목이 터지라 찬양과 기도 할 기회를 주는 교회가 있다는 게 내겐 행운이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나는 이 찬양을 다른 어떤 찬양보다 더 크게 불렀고, 부를 때 꼭 눈물을 흘렸다. 많은 사람, 특히 하나님이 인정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위안을 주었다. 세상은 슬플 일이 참 많다고, 그러나 그 또한 예수님이 함께하는 과정이니 그렇게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오히려 세상엔 기쁜 일도 많으며 삶에는 기대할 것이 존재한다고.


슬픔은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감정이다. 어렸을 때 넘치던 힘을 슬퍼하는데 펑펑 써버렸다. 그러나 낭비도 경험이다. 나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만한 고백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십 대가 저물어가던 어느 금요일 밤, 자기연민에 빠져 한참을 울다가 결국에는 내 입을 열어 시키신 말이었다.


“하나님, 저로 사는 건 쉽지 않아요. 그렇지만요,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나는 괜찮아요. 앞으로 제가 죽을 때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이 함께 한다면 나는 괜찮을 겁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