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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근 Aug 02. 2017

서른이 되면 삶이 좀 쉬워지나요?

[ 3 ] 담담함이 필요할 때


"요새 케이크가 정말 먹고 싶었어."


적당히 보송보송한 빵과 촉촉하고 달콤한 크림이 입안을 츄릅 츄릅(?) 뛰노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카페로 약속을 잡았다. 외국 나온 후로 내 삶에 희박해진, 동갑내기 친구를 만나는 자리다. 키치너-워털루는 오래된 공장들 때문에 겉보기에 우중충해 보이는 곳이지만 명색이 대학생 타운인 만큼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는 카페도 종종 볼 수 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워털루 공대를 포함해 워털루 쪽에는 대학교가 몇 개 있다. 우리는 그 수혜자로, 더이상 젊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학생은 아니지만 만족한다.


"무슨 케이크 시킬까?"


친구는 치즈케이크가 끌리는 눈치다. 무스... 촉촉... 치즈케이크는 텁텁한데... 나는 다른 케이크를 차례로 가리켰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이 시간이 되도록 대부분의 조각이 안 팔린 것을 보니 맛이 있을 것 같지 않다며 부정적이다. 제일 밑에 있는 티라미슈 비슷한 케이크를 마지막 보루로 삼고 눈빛을 보냈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달다구리다.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도 편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과의 시간은 내 체온에 꼭 맞는 목욕탕에 들어간 것 같다. 서로의 온도차가 거의 없어서 나를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사람은 나와 생각하는 방식이 너무 달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부지불식간에 확인받게 된다. 차가워서 시원해! 뜨거우니 후끈후끈 하구만~ 극명하게 다른 시각차는 강렬한 인상과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다.


이 친구는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자라 어른이 되어 만난, 편한 사람이다. 기질은 달라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곧잘 알아듣는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손에 꼽는다. 하지만 우리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마음이 흐르는 길을 맞출 수 있었다.


어릴 적에는 '친함'의 게이지가 있어서 게임 생명력이 닳고 또 쌓이는 것처럼 수치가 높으면 우정이 깊고, 낮으면 별 중요하지 않은 관계라고 정의했다. 친함의 성분은 함께한 시간과 경험이었다. 더불어 내가 상대방에게서 느끼는 편안함, 즉 나의 기분도 크게 한몫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우정의 정의는 때때로 잘 맞지 않았고 걸리적거릴 때도 많았다. 마음의 접점은 없지만 이상하게 비슷해서 앞으로도 쭉- 동행하게 될 듯한, 평행선 같은 관계가 있다. 그런가 하면 마냥 편하지는 않지만 이따금씩 부딪히는 접점으로 내 정신을 깨우는 물결 모양의 사이도 존재한다. 이런 양질의 관계를 '안 친해'라고 단정 짓는 건 내 손해 아닌가.


"몇 주 전 우리 집에 경찰이 왔다 갔어."


게다가 이런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나눌 사람을 찾을 때에는 내 구식 '친함 게이지'가 별 쓸모없다. 드래곤볼에서처럼 삐빅-하면 절대값의 견적이 나오는 인간관계는 없다. 내가 아는 사람의 수만큼의 우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중 감정 소모가 너무 많은 일을 겪었을 때에는 특별한 사람을 찾게 된다. 담담한 대화를 할 줄 아는 사람.


상대방의 감정이 놀라움이든 안타까움이든 분노든 호기심이든 상관없다. 나의 고백으로 인해 적지 않은 감정이 발현될 때 나의 마음은 언제나 그 반작용에 영향을 받는다. 자기가 말해놓고 놀라는 꼴이다. 나의 의도는 잠깐이라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무거운 책가방을 벗었을 때의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다. 어차피 나만이 지지고 볶아야 하는 숙제다. 자리를 떠나기 전 잊지 않고 챙겨 넣을 예정이었다. 그뿐인데, 상대방이 호들갑을 떨면 나도 그래야 할 것만 같은 이상한 부담이 생겨버린다. 공감해 주고픈 고마운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에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처럼 왠지 내 마음이 그래지는 것을 나는 관찰할 뿐이다.


십 년 전만 해도 나의 이야기에 강렬하게 반응해 주는 사람이 좋았다. 감정표현이 공감의 척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웃는 사람과 함께 웃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는 말도 있잖은가. 하지만 이야기하면 할수록 설명을 덧붙여야 하는 경우가 늘 생겼다. 나와 타인은 완벽히 일치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 너무 차가웠다. 왜 상대방이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지 못할 때 상처받아야만 했을까?


"그랬구나."


친구는 담담하게 말했다.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고 내 반응을 살피는 기색도 없다.

그리고 나는 위로받는다.




우리는 큰 감정의 개입 없이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보통의 대화처럼 공감 가는 생각에 기뻐하고 각자의 인생에서 돌아가는 여러 일에 대한 감상을 말했다. 아픈 데 고춧가루 뿌리는 실수를 피하기 위해 담담함을 가장한 무덤덤이 필요했던 걸까? 하지만 우리는 감사한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힘든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의 좋은 인연을 만났다. 평탄한 인생은 없다지만 조금 덜 평탄하게 느껴지는 내 삶의 굴곡을 돌파할 수 있도록 도와준 소중한 멘토를 얻었다. 달갑지 않은 시기를 감내해야만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동행자는 쓸데없는 감정의 소모를 막아준다.


"예전에는 내가 나로 살아가는 게 참 힘들다는 생각을 했어.

그런데 최근에서야 나의 모습을 인정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맞아 나도 그래.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전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인데 요즘엔 확실히 덜 힘드네."

"이십 대 초중반엔 내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많이 했는데."

"응. 전엔 내가 바랐던 이상적인 모습과 현실의 간극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힘들었던 것 같아."

"오, 이제는 좀 인정할 수 있게 된 걸까?"

"... 우리 늙어가는 것 같아."

"점점 유연하게 생각할 수 있게 진화하는 거라고 해줘."

"음... 이게 서른 살의 여유인가?!"


자신에게 매몰되어 있었던 이십 대에서, 나 자신을 돌보기 시작하는 삼십대로 넘어가는 시기일까. 나를 이따금씩 타인으로 간주해본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듯이 나에게도 '너 이런 면이 있었구나' 하며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주인의 소유물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되어 보는 것이다. 캐나다 초등학교에서 일하다 보면 많이 볼수 있는 stewardship이 같은 개념인데, 환경보호와 관련되어 널리 쓰인다. 내 소유가 아니라 잠깐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에 소중히 가꿔야 한다는 뜻이다. 내 몸을 빌려 쓴다는 말이 이상하지만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이 선택권 없이 주어졌다. 아무도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여러 가지 상황을 맞이할 때 나오는 나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분석하고 또 재해석하여 나를 알아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계약 만료일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반납해야 하는 조건 아닌가. 이런 실정에 나의 얼마만큼이 내 지분이라 주장할 수 있을까?






모든 것에는 채워지지 않을 간극이 있다. 타인과 나 사이에 그리고 나와 나 사이에조차 존재한다. 그러나 서른 즈음에~ 그게 그렇게 슬프고 상처받을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간극은 내가 나일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신의 선물이다.




글, 그림 상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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