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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물고기 Jul 03. 2023

도움 되는 기분

[밑미 리추얼 외면일기] 2023.07.03.

meet me 리추얼을 시작했다.

커리어 액셀러레이터 김나이 님의 <자기만의 트랙>을 읽다가 밑미라는 플랫폼을 알게 되었고, 한 번 들어가봤다가 마음이 홀려 리추얼메이커 김해서 님의 '하루 한 쪽 외면일기' 리추얼을 신청했다. 함께하는 메이트들의 글도 볼 수 있고, 3주간 매일 인증글을 올리는건데 쉬고싶은 날은 부담없이 쉬어도 된다. 



글을 꾸준히 쓰겠다고 다짐해봐도 글감이 없으면 진득하게 글을 쓰기 어렵다. 글감이 없는 이유는 외부세계에 별 감흥을 못느끼기 때문인데, 그렇게 되면 결국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이나 먹었던 음식을 그저 기록하는 신변잡기적인 글을 쓰거나, 내면으로 침잠해서 자기연민이나 한탄이나 하소연하는 글을 쓰거나, 고작 그런 글밖에 못 쓰는 자신이 한심해서 아예 글을 안쓰게 된다. 

그런데 외면일기(사람, 사물, 동물 같은 외적 세계로 눈을 돌린 일기)라는 컨셉의 리추얼을 해보면 글감을 건져내기 위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선명하게 바깥 세계를 보려고 애쓰게 되지 않을까 해서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살려내기 위해서라도. 3주간 부지런히 관찰하고, 생각하고, 써보려고 한다. 

시작.




최진영, <구의 증명>


2023.07.03. 월요일. 맑고 덥고 몹시 습함.

 
도움 되는 기분
 
오늘은 공기가 팔다리에 척척 감기도록 덥고 습했다. 퇴근길의 환승역은 인파로 가득했고, 우리가 내뿜는 열기와 이산화탄소로 플랫폼은 한증막에 가까웠다. 설상가상으로 지하철을 타자마자 갑자기 전등이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더니 열차의 냉방시스템이 고장났다는 방송이 나왔고, 송풍기만 겨우 가동되고 있었다.
 
그러한 고난의 와중에 내 앞에 선 승객의 레이스 블라우스 어깨 부분이 다른 승객의 백팩 지퍼 손잡이에 걸려 버리는 곤란한 상황이 발생했다. 옷은 쉽게 빠지지 않아 블라우스 주인의 목덜미는 더위와 난처함으로 달아오르고 있었고, 지켜보는 내 마음까지도 난처해졌다.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블라우스 주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고, 무사히 그녀를 가방에서 떼어 내는 데 성공했다. 고맙다고 말하고 사라지는 그녀의 얼굴에서 안도감을 읽었다. 그리고 그저 도움 되는 기분 자체가 기쁘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낯선 사람을 경계한다. 상경한 첫 해에 교보문고 철학도서 서가에서 서성거리다 내게 살갑게 말을 걸며 책을 추천해 달라던 또래 여자가 사실은 나랑 친구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함께 조상에게 치성을 드리러 가고 싶었음이 밝혀진 일이 있었고, 내게 대뜸 말을 거는 사람에게는 대부분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어엿한 도시인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십 년 넘게 길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익명의 타인과 가급적이면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무표정하게 갈 길을 가면서 지내왔다. 누군가 반가운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설문조사 좀 해주실래요?"라고 말을 걸면 우선은 공기 취급하며 지나가보고, 끈질기게 따라 붙으려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내가 그렇게 만만한 먹잇감으로 보이지는 않을텐데 거기까지만 하지?'라는 사나운 눈빛을 하고 인상을 확 구겨 보이는 식이다.
 
대부분의 관계는 결국은 필요에 기반한다. 슬프게도 꼭 길에서 말을 거는 낯선 사람과의 관계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마음을 기대지는 못하고 살 것 같다. 쓸쓸하지만 사람은 누구라도 믿을 존재가 아니라,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기로 결단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지만 도움 되는 기쁨을 잊지않고 살다 보면 사람들을 점점 덜 미워하고 점점 더 사랑스러워하면서 살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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