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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물고기 Jul 05. 2023

사라진 태풍의 이름

[밑미 리추얼 외면일기] 2023.07.04.

Oskar Kokoschka, The Bride of the Wind(Die Windsbraut)


2023.07.04. 화요일. 많은 비

 
사라진 태풍의 이름
 
그동안 공기중에 잔뜩 머금고 있던 습기를 온통 다 토해내는듯 퇴근길에 우산을 써도 채 막지 못할만큼 많은 비가 왔다. 2004년 8월 16일 오후에 발생, 8월 19일 부산 일대에 상륙해 한반도를 휩쓸고 간 태풍의 이름은 메기였다. 거의 이십 년이 지났지만 그 거대한 물고기가 한바탕 용틀임을 하던 날 밤의 풍경은 아직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은 아마도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가장 죽음에 가까워졌던 순간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 살던 시골 우리집 근처에는 봄이면 하얀 찔레꽃 피던 조그만 산이 있었다. 메기가 우리집 근처에 오던 날 저녁에는 심상치 않게 비가 많이 왔다. 이웃에 있는 친척집으로 피신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둥소리인지 뭔가 폭발하는지 모를 큰 소리가 났다. 계속 내리던 비가 지반을 약하게 해 산이 무너졌고, 눈 앞에서 토사와 흙탕물과 뿌리째 뽑혀 쓸려 내려온 나무가 방금 전까지 있던 집을 덮쳤다.  


일기장도 흙탕물에 젖어 못쓰게 되어서 여름방학이 끝나고도 방학 일기를 내지 못했고, 이사를 갈 때까지 잠깐 이재민이 되었을 뿐 우리집에서는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살다보면 눈 깜짝할 새에 모든 일상이 흙탕물에 휩쓸려가는 일도 생긴다는 것을, 죽음은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모퉁이 뒤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 살아있는 것도 우연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어린이가 되었다. 열한살 인생.


2010년, 2016년, 2022년에 온 태풍에 다시 메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메기는 몇백 사람의 목숨을 더 앗아갔고, 그 탓에 2023년 3월에 제명되었다. 이제 메기는 오지 않는다. 그 태풍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언젠가 다른 이름의 태풍이  산을 무너뜨리고, 그러고도 내가 살아남는다면 그때는 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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