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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과삶 Oct 21. 2018

나는 왜 쓰는가?

왜 쓰는가? 어떻게 쓸 것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

"작가는 지배하기 위해서 쓴다."에서 정희진은 '왜 글을 쓰는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김훈(2001)은 현실의 운명과 생명의 운명을, 정찬(1992)은 고통과 위안을, 차학경(1982)은 말하려는 고통과 말하지 않으려는 고통이라는 대조적인 표현으로 모순된 인생을 글로 표현한다. 작가는 독자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 가혹한 고통을 감내하고 글을 쓴다고 한다.


걸작은 다독, 다작, 다상으로만 나오지 않고 인간의 운명적 순간, '절정'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면서 특히 이청준의 1977년 단편집 <예언자>에 실린 '지배와 해방' 소설을 권한다. 안타까운 점은 1977년판 <예언자>에는 '지배와 해방'이 있었으나, 현재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2001년 <예언자>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1977년판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읽을 방법이 없다. 


'지배와 해방'에서 글을 쓰는 이유는 글쓴이 자신의 동기와 인간적 욕망에서 출발하여 일기와 편지의 형식으로 드러난다. 그 다음은 바깥 세계에 대한 복수심과 지배욕인데 이 지배는 조화롭고 창조적인 지배, 화해하는 지배라고 한다. 정희진은 생계를 위해 썼기 때문에 스스로 '왜 쓰는가' 질문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럼 '나는 왜 쓰는가?' 아니 '언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가?'로 돌아가 보자.


초등학생때 시작한 그림일기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쓰고 있다. 고민한 날만큼 일기가 남아있다. 마음이 정리되지 않거나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일기를 썼다. 글로 마음 상태를 쓰다 보면, 정리가 되고, 객관화가 되었다. 워드로 쓰기 시작한 것은 2000년부터다. 몇 번의 이사로 손으로 쓴 일기는 찾을 수 없는데 워드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2000년에 워드로 쓰면서 월 단위로 파일을 만들었다. 그래서 약 2006년까지 7년 치의 일기를 월 단위로 보관했다. 같은 월이 오면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고민을 했었는지 읽어보고, 지나간 시절을 회상했다. 그 이후엔 년 단위로 파일을 저장하고 있는데, 가끔 파일을 전부 읽어보면서 방황했던 나를 돌아보는 기쁨을 가진다. 옛 일기를 읽으면 괴롭고 힘들었던 과거도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니다. 또한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으로 사는 사람인지,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나의 높은 자기이해 능력은 일기 덕분이다. 


최근에는 지난 일기를 많이 보지 않고 있다. 젊은 시절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의 과거는 어땠는지 궁금한 사람'이었다면, 지금 나는 '앞으로의 내가 어떻게 달라질 지,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지가 더 궁금한 사람'이다.


브런치에서 다른 작가들과 함께 쓰는 매거진이 있는데 그 주제가 <같이 쓰는 오늘>이다. 함께 쓰는 공간이므로 글을 너무 많이 올리거나, 너무 적게 올리는 건 민폐 같아서 주 1회 올리기로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주간 성찰>이다. 일주일간 생활에서 느낀 점을, 내용은 일기이면서 형식은 편지체로 쓰고 있다. 현재까지 세 번 발행했는데 내 삶을 주간단위로 정리하고 성찰하니 힐링이 된다. 


나는 느끼고, 생각하고, 배운 것을 글로 정리하면서 스스로 위로 받으려 쓴다. 일기는 내 마음을 정리하고,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챈다. 이렇듯 일기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느꼈거나 배운 것을 알리려고 쓴다. 알리고자 하는 욕구에는 진심으로 좋은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과 그 결과로 얻는 고마움과 칭찬, 혹은 주목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때로는 진심이 앞서고 때로는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작가들이 거대한 담론으로 고행을 감내하며 써내는 문학작품과 상반되게 나는 그야말로 일상에서 느낀 점이나 경험을 공유하는 수준으로 글을 쓴다. 그럼에도 머릿속은 온통 글감으로 가득하다. 매 순간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좋은 글을 볼 때마다 '이 주제로 글을 써야지.'하고 메모한다. 현재로서는 다작의 단계일 뿐 칭찬이나 주목을 받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좋아서 쓴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글로 써내고 나면 다시 새로운 생각을 채울 수 있는 후련함이 있다. 


정희진은 글 초반에 '좋은 글귀를 나눠 갖고 싶은 마음이 독자의 마음이고 이 마음이 작가의 지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지배라기보다 내 글을 나눠 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어떻게 해야 독자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작의 단계를 넘어서면 될까?


내가 글을 쓰는 또 하나의 이유는 책을 내기 위해서다. 나는 유명하지 않은 일본인 작가가 생활 속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 좋다. 화려한 기교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고통 속에 나온 문학작품이 아니다. 지금이야 많이 바뀌었지만 한국에서는 유명 작가만 책을 낸다는 인식이 강했다. 반면 일본에서는 누구나 작가가 되어 개인 경험을 중심으로 책을 많이 쓴다고 들었다. 그런 책이 번역되어 한국에서도 많이 출판되었는데 그런 수수한 책이 좋다. 나도 죽기 전에 그런 책을 쓰고 싶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험과 통찰의 순간을 잊게 되므로 지금부터라도 차곡차곡 써서 언젠가 책으로 엮고 싶다. 책을 내어 내 경험을 공유하고 싶기도 하지만, 내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다. 


나는 내면을 정리하고 공유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내 이름을 널리 알리고자 글을 쓴다. 인정받고 싶은 동기와 명예라는 인간적 욕망의 발현이다. 즉, 세상에 나를 알아달라고 외치려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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