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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과삶 Nov 12. 2019

삼계탕을 끓이며 하는 생각

고정관념과 관성을 버리자

우리 집 여름철 보양식에 삼계탕을 빠뜨릴 수 없다. 사실 어려워 보이지만, 삼계탕만큼 쉬운 요리가 없다. 쉽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생닭을 사서 헹궈 큰 냄비에 넣고 닭이 잠길 만큼 물을 붓는다.

2. 대추, 청양고추, 통마늘, 다시마, 소금을 적당히 넣는다.

3. 1시간 끓인다.

4. 닭을 건져낸 육수에 고춧가루와 청양고추를 조금 넣고 칼국수를 넣고 끓이면 닭칼국수가 된다.


정말 간단하지 않은가? 생닭을 마트에서 사면 6,000-7,000원 정도 하니 집에서 저렴하게 보양식으로 먹을 수 있다. 나는 여름철이 되면 집에서 늘 두세 번 이상 삼계탕을 끓인다. 이때 내가 하는 의식이 있는데 바로 '살 바르기'다. 푹 끓인 닭을 가족이 다 같이 젓가락으로 뒤적거리며 먹는 게 불편하므로 일회용 장갑을 끼고 먹기 쉽게 뼈와 살을 분리한다. 갓 끄집어낸 닭이 너무 뜨거워 일회용 장갑 안에 흰 장갑을 끼지만 그래도 손가락이 따끔거린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맛나게 먹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며 열심히 다듬는다. 그렇게 십수 년 닭살을 발랐다.


얼마 전 삼계탕을 끓일 때, 다 큰 아들이 아직도 엄마가 서서 뜨거운 닭을 잡고 살을 바르니 민망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엄마, 이젠 엄마가 살 바르지 말고 그냥 알아서 뜯어먹자. 왜 일일이 발라줘? 애도 아닌데"


'그런가? 내가 다 큰 어른 앞에서 뭐 하는 거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도 했는데 그래도 나 하나 희생하면 다른 사람이 먹기 편하니, 계속 올여름은 먹기 편하게 살을 발라내어 주었다.


오늘 비도 오고, 한여름에 치닫는 것 같아 삼계탕을 또 끓였다. 언제나처럼 식탁 옆에 서서 뜨거운 닭과 씨름을 했다. 이번에 아들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엄마, 왜 통닭을 사서 끓여? 잘라진 닭을 사서 삼계탕 끓이면 안 되나? 그러면 각자 알아서 치킨 먹듯이 뜯어먹으면 되잖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사실 우리는 생닭 안에 찹쌀을 넣지 않는다. 그럼 굳이 통닭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잘린 닭을 사도 육수는 그대로 나올 것이고, 각자 덜어서 뜯어먹으면 되니 내가 일일이 발라주지 않아도 된다. 왜 난 통닭을 사서 지금껏 끓인 걸까? 왜 마트에서는 '삼계탕용 닭'으로 검색하면 통닭만 나오는 걸까?


그렇다. 고정관념이고 관성이다. '삼계탕은 통닭으로만 끓여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이 나를 수십 년 동안 잡았던 거다. 관성처럼 삼계탕을 끓이려면 통닭을 사야지, 한 번도 잘린 닭을 사야겠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순간 관성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진즉, 잘린 닭을 사서 끓였다면 손가락을 호호 불어가며 뜨거운 닭을 만지지 않아도 되고, 엄마가 다 큰 아이들을 어린아이 대하듯 살을 발라주지 않아도 되고, 등뼈같이 큰 닭 뼈 쓰레기도 줄 텐데 말이다. 


올해는 삼계탕을 거의 다 먹었고, 내년부터는 잘린 닭으로 삼계탕을 끓여봐야겠다. 이제 모두가 평등하게 식탁에 앉아 도란도란 닭을 뜯으며 보양식을 먹겠지? 이렇게 간단한 삼계탕을 끓이는 데도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 


내 삶에서 무의식적으로 관성에 따라 아무 생각 없이 계속하는 건 무엇일까? 늘 하던 거니까 계속해야 할까? 같은 일이지만 왜 해야 할까? 나는 왜 이 일을 하려고 하는 걸까?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을까? 


분명 고정관념 때문에 습관적으로 계속하는 게 있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지속한 삼계탕 살 바르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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