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나의 고향이 나를 부르듯, 한국으로 가기 전, 또 한 번 타즈매니아 Tasmania를 찾았다.
그리고 3월에 열린 작은 규모의 레인보우 게더링. 세 차례라는 레인보우 경험은 나에게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해 주었다. 혼자 살 수 없음에도 나는 그 커뮤니티 속에서 혼자만의 개별적 삶의 진로가 정답인 것처럼 지낼 때가 있었고, 너와 나는 서로 너무 달라라고만 외치던 당시에 나는 오히려 외로웠다.
혼자는 살 수 없는 인생
내가 느끼고, 이해하고 있는 이 사회적 흐름은 개별적인 행동과, 개별적인 성취를 위해 사회가 만들어놓은 방식대로 따라가면 유리한 시스템으로 되어있다.
마치 고등학교 때까지 대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입학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고는 그 성취감이 가져다주는 기대와 함께, 내가 원하는 대학교를 들어가려 고군분투한다. 잠깐의 대학생활 동안, 어떤 직장을 가지면 삶에 좋을지, 내가 공부하는 전공을 살리거나, 또는 잠시 진로의 방향을 바꾸어 취업에 성공하기도 한다. 취업을 하게 되면, 어느 정도 나이가 되니, 인생의 짝을 만나고, 그 상대방과 한평생을 함께 할 거라고 사람들 앞에서 맹세를 한 후, 결혼이라는 사회적인 규칙 아래에서 나의 삶을 산다.
짝과 함께 살기 위한 보금자리가 필요하지만, 아직 모아놓은 돈이 그만큼은 되지 않아 대출을 해 집을 마련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돈을 모아놓으니, 차도 있으면 좋겠다 싶어 차를 마련하기도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니, 우리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있으면 참 좋겠다 싶어 자녀 계획을 세워 본다. 그러다 보니, 내가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지, 누가 나를 돌봐줄까,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일을 더 이상 못하면 없어지는 고정 수입이 걱정되어 더욱 열심히 노후를 준비한다. 그리고 혹여라도 큰 병이 날까 두려워, 보험을 가입하고 그 보험에 차곡차곡 돈을 입금한다. 이 시스템과 굴레라는 것이 편리하기도 하다. 이 시스템대로, 남들이 살아가는 대로만 따라 하면, 나는 혜택을 받고, 나의 삶에 대한 걱정은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 사실, 이 이야기를 들어보고 있으니, 나는 계속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더라. 그리고 그 미래에 대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계획을 마치 다 알고 있듯이 사회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 굴레는 굴레의 속성 마냥, 계속 굴러가려 하고, 다수의 선택들이 어느 순간에는 삶의 진리인 것처럼, 이것만이 삶을 살아가는 ‘옳은’ 방식인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존재감과 행복은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무언가에 의한 것인지 궁금해한다.
나는 지금 만나는 사람과 사랑하고 생활하면서도, 결혼을 안 하기로 했다. 나와는 다른 모국어를 구사하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며 이 나라 저 나라 왔다 갔다 하고, 고정적인 직장은 없고, 내 이름 아래 집도 없다.
쓰다 보니까 아직 가진 거라고는 그다지 없고, 제대로 해본 사회생활도 없다.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직장생활이라 하면 대학교 졸업 후, 1년 반 가량 있었던 영화사 신입 생활, 그게 다. 그래서 직장생활 고충도 잘 모르고, 지인들은 신입보다는 높은 직급에도 있는데 나는 그만큼 열심히 다녀본 회사가 없다. 그래도 사실 가끔 조바심이 난 적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행복하다.
대략 5년이라는 시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는 포근한 환대와 내 ‘집’이라는 공간과 기억에서 오는 익숙함도 있었지만, 한편 내가 잊고 있었던 한국 사회의 바쁨, 개인적 성취를 위한 삶의 잔상을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의 얼굴들에서 마주했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교 지인들과의 자리, 몇 차례 우리는 술자리와 이야기로 만났고, 매 순간 나는 그들이 지내오는 삶의 이야기를 그대로 듣고, 그들의 삶을 상상하고 이해했다. 그러던 마지막 약속, 그들 중 누군가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하는 말.
“ 이제 나이 값을 좀 해야지.”
나는 그가 말하는 '나이 값'이라는 것이 궁금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되물었다.
“ 이제 좀 사회 구성원이 되어보라고.”
평소에 장난도 잘 치는 그라, 물어보지 않아 그가 어떤 의도로 말하였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가 나에게 마지막 인사와 함께 ‘인생의 충고’를 준다는 것에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사실, 몇 년 동안 그 사회 구성원이 되지 않으려고, 또는 어떤 누군가에게 누군가가 되지 않으려고 열심히 도망 다니고 나름의 삶의 방식을 살아가고 있었다. 신경도 쓰지 않았던 그 시선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우리 모두,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하지 않는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찾으려 하지 않던가.
많은 시간을 나를 증명하려고, 아니면 남의 기대, 사회에서 오는 기대, 남들이 어떻게 나를 바라볼지를 삶의 순간에서 떼어놓기가 너무 어려웠다.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지금은 기대와 그 기대에서 오는 실망감도 많이 없어졌다.
소유하는 것이 별로 없으니, 걱정할 일이 별로 없고, 영원할 것 같다는 것이 내 이름 아래 놓인 것이 없으니,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 순간만큼 정말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