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오백 오십 한 번째 주제
부모님 댁 뒷편에 원래
작은 텃밭같은 공간이 있었다.
우리집은 상가있는 주택이라
마당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딱 작은묘목 한그루 정도 공간의
미니 텃밭이 있었다.
처음에 그 공간에 대추나무가 있었는데,
어쩜 그렇게 탁
기억이 났냐면,
어릴때 그 나무에 열린
연두색 생대추를 따먹었으니까.
그러다 시간이 좀 흐르고
어쩐지 그 나무가 사라진 자리에
여러개의 봉선화가 자랐다.
잘 영근 씨앗주머니를 톡톡
터뜨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재미를 알 것이다.
그렇게 내가 장난으로 흩뿌린
봉선화도 몇년 뒤에
사라졌다.
그 화단은 이내 곧 사라졌다.
그런데도
또렷이 그 대추나무도,
봉선화도 기억이 나는 것은
내 어릴 때 기억에
그 나무가 꽤 강렬했던 탓이다.
대추가 달았거든,
발간 봉선화도 제법
튼실하게 크던 곳이었거든,
이제는 없지만.
-Ram
1.
말레이시아에 살아보니 내가 나무가 많은 곳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곳엔 어딜 가나 초록 초록한 나뭇잎이 우거진 나무들이 많았고, 거기에 하얀 구름들이 뭉실뭉실 떠다니는 파란 하늘까지 완벽했다. 한국에 살 땐 나무들이 딱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말레이시아에 살다가 다시 한국에 오니 가로수, 산, 근교에 있는 나무들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추운 겨울에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는데 아파트 앞에 나무들이 모두 가지치기가 되어 있었다. 빨리 저 나무들이 쑥쑥 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분리수거를 하고 집에 오는 길에 아파트 앞에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봤다. 어찌나 눈이 즐겁던지. 또 아파트 관리사무소 뒤에는 조그마한 상록침엽수 같은 것이 이발을 동그랗게 한 채로 서있는데 그 모습도 꽤 귀엽다. 매일 분리수거하러 가면서 보는 나무 중 하나. 귀여워. 어쨌거나 나무가 없는 곳은 이제 상상할 수 없다. 나무가 없는 곳에선 살 수 없다. 나중에 내가 나무를 직접 심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2.
처음엔 나무 같아서 좋았는데
진짜 나무인 것처럼 아무것도 안 할 줄이야.
-Hee
1.
훗카이도 대학 캠퍼스는 하나의 거대한 식물원 같았다. 짙은 그늘을 캠퍼스 전체에 드리우는 키가 큰 나무들. 나는 늘 녹음이 건물과 조화롭게 자리 잡힌 거리를 걸을 때 그 도시의 기다란 역사를 느끼곤 했다. 삿포로를 여행하는 동안 아침마다 몇군데 목적지를 정해놓고 달렸는데, 나카지마 공원과 마루야마 공원을 달릴 때에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마음의 뿌리를 쉽게도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이 도시에서라면 관광객의 신분이 아닐지라도 막연히 바라왔던 초연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겨울철 눈 여행으로 유명한 도시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삿포로에 살면서 계절이 흘러가는 모습을 천천히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2.
통창 밖으로 우거진 나무들이 가득히 보이는 사진을 우연히 보고는 부럽다는 생각을 며칠이나 했다. 그러고 나서 문득 살고 있는 숙소의 창밖을 바라봤는데 의외로 보기가 괜찮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젖어가는 자그마한 숲이 창밖에 있었다. 북향에다 습하고 벌레 많고 같이 사는 이웃들도 매너라곤 없는 음습한 숙소이지만 마음에 드는 한구석을 비로소 찾아낸 것 같았다. 새벽같이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일상이지만 창밖을 느긋하게 바라볼 여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사진 한 장 덕분에 일상에 평화가 찾아온 것 같다. 이래서 싫어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한 것일지도.
-Ho
나무는 땅에 뿌리를 두고 서있다.
흔들릴 때마다 나무의 뿌리를 생각한다.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단단히 서있고 싶다.
나는 아직도 작은 것에 흔들리고, 불안하다.
스스로 불안을 만들어내서 놓지 못할 때가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을 아직도 하게 될 줄이야. 이건 고상하고 철학적인 질문보다는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에 가깝다.
우리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이 있고, 그래서 돈이 필요하고 가족이 필요하고, 누구는 자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불안을 잘 다스려야겠지.
단단히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서로 도와서 숲을 이루는 나무처럼,
싱그럽고 산뜻하게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자.
-인이
2024년 7월 28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