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넷맘 Feb 21. 2019

아들 넷 엄마의 삶

그렇습니다. 저는 아들 넷 '방목 육아' 중입니다.


어른의 제재보다는 또래와 어울리면서 자발적으로 행동을 바꾸는 것, 자신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행동하는 것,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육아의 방식이자 아이가 많은 집안의 최대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부정적인 고집을 보이면 의도적으로 외면했고 위험하지 않다면 사소한 충돌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공원까지 걷는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벌써 세 사람이 유모차를 멈추게 하고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져왔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르지만 보통 그들로부터 건네받는 질문은 몇 가지로 정해져 있다.     


“세쌍둥이 시험관이죠? 자연산이에요? 인공수정이에요?”     


어쩌면 누군가에게 묻기가 미안해질 수도 있는 이런 사적인 질문들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다. 아이에게 자연산이라니. 노량진 수산시장에서나 들을 법한 직설적인 물음에 어쩔 때는 기분이 불쾌해진다.

      

“아들 넷을 혼자 키운다고? 아니, 말도 안 되지! 친정 엄마나 시엄마 중 누구 한 명은 붙어야지. 애기엄마, 힘들어서 어떡해. 에고.”     


오늘도 같은 레퍼토리의 질문이 이어진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유난히 나를 안쓰러워하고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낸다.     


“아니요. 하나도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요, 그래도 큰애를 키웠을 때보다는 훨씬 더 여유 있고 행복한걸요.”     


이어지는 나의 대답에도 혀를 차는 그녀의 소리는 여전히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나의 대답이 인사치레로 건네는 자동반사적인 대답이라 여겼을 것이리라. 솔직히 힘들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나에게 하루는 아직도 천국과 지옥을 수십 번씩 오가는 지겨운 여정이기도 하니까.      






세쌍둥이가 제법 아기 티를 벗으면서 육아는 체력전을 벗어났지만 아이들의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고집이 세지면서 육아는 정신전이라는 새로운 고비를 맞이했다. 언제나 세 아이들에게 똑같은 장난감을 사줄 수는 없기에 아이들은 장난감 하나를 나눠 쓰는 법도 배워야 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여서 장난감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물고 할퀴고 때리면서 집 안은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이 울음소리는 생리적인 욕구를 해소해달라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떼가 잔뜩 섞인 울음소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쟁취할 때까지 이어졌다.      


나는 아이들의 모든 울음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아이 넷의 욕구에 일일이 반응해줄 여유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엄마를 통해 바른 역할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통해 스스로 깨우치기를 바랐다. 어른의 제재보다는 또래와 어울리면서 자발적으로 행동을 바꾸는 것, 자신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행동하는 것,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육아의 방식이자 아이가 많은 집안의 최대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부정적인 고집을 보이면 의도적으로 외면했고 위험하지 않다면 사소한 충돌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유난히 개구쟁이인 1호는 여자아이처럼 예쁜 외모와 작은 체구와는 달리 욕심이 대단해 세쌍둥이 중 서열 1위가 되었다. 자신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도 다른 아이가 장난감을 집기라도 하면 잽싸게 달려가 그 장난감을 빼앗았다. 그리고 장난감을 뺏긴 아이는 바닥에 엎어져 대성통곡을 했다. 하지만 나는 서로 물고 때리는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간섭하지 않았다. 대신 장난감을 양보하는 다른 아이를 큰 소리로 칭찬해주며 1호의 의욕을 자극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옆에서 다른 아이의 칭찬을 가만히 듣던 1호가 그 장난감을 가지고 와 빼앗긴 아이에게 슬며시 건넸다.      


“잘했어! 우리 완이 대단해!”      


나는 1호를 힘껏 안고 칭찬을 하며 뽀뽀 세례를 퍼붓는다. 엄마의 뽀뽀를 받은 아이의 얼굴이 한결 밝아진다. 상황은 아이들이 간식을 먹고 정리할 때도 비슷하다. 아이들은 자기 몫으로 무엇인가 주어지는 상황을 선호하는데 두유나 우유, 빵 등을 자기 몫으로 받으면 그것을 뺏기지 않고 오랫동안 갖고 있으려 한다. 그래서 초반에 아이들은 다 먹은 두유팩을 정리하지 않고 손에 쥐고 있기를 원했다. 아무도 정리를 하지 않으려 하니 먹다 남긴 두유가 집 안 여기저기 뚝뚝 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정리를 하지 않는 아이를 재촉하며 훈계하기보다는 정리를 먼저 한 아이를 칭찬해주며 전체적으로 정리를 하는 분위기를 갖게끔 만들었다. 그럼 자연스럽게 나머지 아이가 스스로 정리하려는 의욕을 보였다.      


나의 이런 육아 철학은 세쌍둥이뿐만 아니라 동생들이 태어나기까지 엄마에게 의존적이었던 큰애에게도 적용된다. 거실 벽에 커다랗게 붙여둔 큰애를 위한 생활계획표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기까지 아이의 하루 일과가 시간별로 정리되어 있다. 매일 아침, 큰애는 일어나자마자 화장실로 가서 가장 먼저 소변을 보고 방으로 돌아와 오늘 가지고 갈 학교 가방을 스스로 점검한다. 물론 자신의 옷을 챙겨놓는 것도 아이의 몫이다. 자기 전 아이에게 내일 입을 옷과 양말을 책상 위에 스스로 챙겨두는 습관을 갖게 했는데, 비록 오늘 많이 추워서 이 옷이 오늘의 날씨와 어울리지 않더라도 이 옷을 입게 되어 마주하게 될 상황을 통해 아이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 스스로 하는 습관은 아이를 위해서도 그리고 세쌍둥이를 돌봐야 하는 엄마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두 돌을 갓 넘은 세쌍둥이도 큰형을 따라하며 제법 스스로 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식사를 위해 상을 차릴 때도, 집에 돌아와 스스로 옷을 벗을 때도, 세탁물을 정리할 때도, 장난감으로 널브러진 거실을 정리할 때도 아이들은 하나가 되어 엄마를 돕는다.      


<마더 쇼크>라는 다큐멘터리에서 한국과 영국 가정의 아침 풍경을 비교한 적이 있었는데 일곱 살 아이를 둔 두 가정의 모습이 충격적일 만큼 대조적이었다. 한국 엄마는 아이를 깨우는 것부터 밥 먹이기, 씻기기, 옷 입히기 등 모든 부분에 깊이 관여하며 아이의 행동을 이끈 반면, 영국 엄마는 아이를 깨우지도 않았다. 영국 아이는 스스로 일어나 밥을 먹고 씻고 옷을 입었다. 아이의 모든 행동은 자신의 통제 하에 있었고 행위에 대한 결과 또한 자신이 책임져야 했다.      


세쌍둥이가 태어나기 전, 일곱 살이었던 큰애는 스스로 양말조차 신으려고 하지 않았다. 스스로 할 수 있음에도 마치 엄마가 양말을 신겨주는 행위를 통해 아이가 엄마의 사랑을 한 번 더 확인하려는 심리도 엿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를 위해 하나라도 더 해주는 것이, 헌신적으로 챙겨주는 것이 모성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는 양말 한 켤레를 신는 것조차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이라고 착각한다. 혹자는 일곱 살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을 할 수도 있겠다. 문화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옳거나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곱 살은 모든 행동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나이라는 것이다. 사랑으로 둔갑한 엄마의 지나친 간섭이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하는 게 아닐까.     





아이 스스로 할 일을 찾아서 하고, 싸우지 않고 장난감을 양보하는 모습! 모든 상황이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전개되면 좋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모습에 더 가깝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기에 매일 실수하고 본능에 충실해 서로 물고 할퀴며 대성통곡을 한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의 울음을 견디기 위해 참을 인(忍) 자를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되새긴다. 아이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필연적으로 경쟁자를 만났다. 형제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의지가 되는 동반자이기도 하다.      


현대에서 재평가되는 흥부는 전래동화에서처럼 마냥 선한 존재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계획성 없이 자식만 줄줄이 낳은 무능력한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것이다. 세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아이들에게 일일이 관심과 사랑을 줄 수 없는 이 상황을 만든 엄마로서 죄책감이 들었다. 아이들이 방치될 것 같았고 어느 아이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이 무능력한 흥부처럼 비춰지는 것 같아 속상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며 깨달았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얻었다는 것을. 그리고 수많은 관계의 접점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것이라는 것을. 아이들에 대한 우리 부부의 바람은 단 한 가지다. 그저 평범하게, 사회에서는 모나지 않은 존재로 가정에서는 우애 있는 형제가 되는 것, 그것뿐이다.     


유난히 아이들을 재우기 힘들어 아이들에게 결국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던 어느 날, 거실로 나가보니 큰애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장난감들을 한곳에 정리해두었다. 지친 표정으로 방을 나서는 나를 보더니 아이가 두 팔로 힘껏 안아준다.      


“엄마 고생했어. 마음 가라앉혀. 사랑해.”      


아이의 말이 가슴에 날아와 쾅 박히는 것만 같다. 이건 아이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아이는 어느새 엄마를 위로해줄 수 있을 정도로 자랐다. 아이는 이미 자기 자신만 아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이는 연신 나를 소파에 누우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소파에 엎드린 나의 등을 부드럽게 밟는다. 아이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진다.      


“글쎄, 큰애가 시장에 있는 마사지 기계를 보고 우리 엄마 아기들 키우느라 고생해서 이거 사줘야 한다고 하더라니까. 다 컸어. 밖에만 나가면 엄마 생각만 해. 애늙은이같이.”      


얼마 전 친정엄마와 시장에 다녀온 큰애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항상 힘들다고 자책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내 마음속에는 매일 지치고 또다시 기운을 차리고 화나고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의 파도가 있다. 하지만 그 파도의 물결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이들이라는 빛나는 모래알들이 있다. 한 알의 모래알은 밝게 빛나지 않는다. 수많은 모래알들이 모여 해변가를 수놓았을 때에야 해변은 더욱 빛날 것이다.     


언젠가 아이들의 삶에도 과거 내가 마주했던 것처럼 거친 풍랑과 비바람이 몰아치는 순간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시련이 닥쳐도 아이들이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고 서로 의지가 되어주며 더불어 빛났으면 좋겠다.


해변을 수놓은 반짝이는 모래알처럼. 

엄마와 아빠의 작은 바람처럼.


이전 09화 세쌍둥이 수면교육에 성공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