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갭이어를 가지게 된 이유
야근은 가끔 가다 발에 닿는 해변가의 파도처럼 밀려오지 않는다. 이미 배, 혹은 가슴까지 일이 차있을 때 저 멀리서 오는 것이 야근이라는 파도다. 이 파도의 특징은 여느 때와 비슷한 파도인 줄 알았다가,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도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건 지금까지 내게 왔던 여타의 파도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조금 뒤늦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멀리서도 커 보였던 파도가 실제로 눈앞에 다가오면 그 크기는 집채만 해서, 파도를 이기려 하기보다는 머리를 물 안에 폭 담그는 것이 그 시기를 지나가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지금 내가 노를 젓고 있든 헤엄치고 있든 서핑보드 위에 있든, 파도를 이기려는 마음은 내려놓고 적당한 때에, 가능한 숨을 오래 참을 수 있도록 폐에 산소를 가득 넣어놓고서, 물 밑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는 것이 이 파도를 보내고도 다시 온전한 몸뚱이로 떠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적어도 몇 번 야근의 파도에 휩쓸려 녹초가 되어본 바로는 그렇다.
이 파도는 코 앞에 오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일상을 살았다. 평소에는 곁에 둔다 해도 아무렇지 않지만 큰 파도가 왔을 때는 부딪혀서 다칠 수 있는 잡동사니들을 치우고, 폐활량을 길렀다. 잔잔한 일들을 해치우고, 꾸준히 클라이밍 수업을 들으러 갔다. 때가 되면 이것도 포기해야겠지만 멀리서 다가오는 파도를 보고 불안한 마음에 벌써부터 이런 것들을 손에서 놔버리면 파도가 왔을 때 이도 저도 못할게 뻔하다. 언젠가는 이 일상도 포기해야 할 때가 오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수없는 야근의 파도를 맞으며 배운 것은 결국 타이밍을 맞추는 능력이었다.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는 이상 파도가 없는 세상에서 살 수는 없었다. 아무리 평화로워 보이는 바다에도 때로는 폭풍우가 쳤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타이밍을 잡는 것밖에 없었다. 너무 일찍, 또는 너무 늦게 숨을 참고 파도에 맞서려다가 다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파도가 다가왔을 때, 나는 하나씩 일상의 것들을 포기했다. 가장 쉽게 아웃 소싱할 수 있는 것은 식사였다. 싱크대에는 물기가 말랐다. 집에서 하는 식사를 포기한다는 뜻은 부엌의 생태계가 멈춘다는 뜻이었다. 집에서는 배달음식조차 시켜먹지 않았는데, 내가 조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식재료를 사 오고, 그것을 다듬고 요리하는 그릇에 담는 식사의 앞부분을 없애줄 뿐이지, 배달음식을 먹어도 남은 쓰레기를 처리하고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서 먹는 것은 물, 나올 수 있는 설거지거리는 컵으로 제한되었다. 냉장고에 들어있는 것들은 유통기한과 상관없이 그 자리에 멈췄다. 야근의 파도가 지나간 후에야, 그들의 갈 길이 갈릴 것이다. 배달 식사는 자주 경험해보았지만 그 외의 집안일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아 나머지 집안일은 냉장고와 비슷한 멈춤 상태에 가까웠다. 다만 다음 날 입어야 할 속옷이 떨어져서는 안 되므로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에는 빨래를 돌렸다. 빨래를 돌리면서 바닥을 밀었다. 한 주간 뽀얗게 쌓인 먼지가 나왔다. 다시 로봇청소기 생각이 났다.
나를 나답게 하는 것들도 포기했다. 연초부터 어떻게든 매일 써오던 100일 글쓰기에서 떨어져 나갔고, 지난 모임 직후 책을 읽어둔 독서모임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의 만남은 모두 취소하거나 뒤로 미뤘고, 할머니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도 뜸해졌다. 화면을 앞에 두고 늦은 점심을 먹는 오후 3시나 퇴근하는 11시에 전화를 걸었다간 할머니는 눈물을 흘릴 것이다. 운동이 그나마 늦게까지 우선순위를 지켰는데, 그 이유 역시 슬펐다. 허리가 아프면 오랫동안 앉아있는데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운동의 횟수도 크게 줄여 발레는 애초에 등록하질 않았다. 골반이 불균형해지고 몸이 굳는 게 바로 느껴졌지만, 발레는 운동이 아니라 나를 이루는 것에 가까우니 빠르게 포기했다. 클라이밍을 하는 중에도 일은 머릿속을 들쑤셨다. 벽을 타고 있는 짧은 순간과 내려온 직후 목에서 피가 펄떡펄떡 뛰는 때를 제외하고는 돌아가서 해야 하는 일들의 리스트가 적히고, 지워졌다, 다시 채워졌다. 왔다 갔다 하는데에 적어도 1시간 반을 써야 하는 클라이밍도 파도 속에서 마지막까지 버티지 못했다. 대신 허리가 아프면 겨우 몸을 일으켜 유튜브에서 5분짜리 플랭크 영상을 틀었다. 30초부터 시작해서 점점 10초씩 늘어나는 이 영상을 이전에는 6세트 꽉 채워서 하고도 힘이 남았는데 이제는 겨우 40초를 겨우 채우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파도가 지나가기를 바라는 이 시간 동안, 회사원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지웠다. 그동안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사람은 점점 괴팍해졌다. 강남과 잠실, 판교의 반딧불이들만 빛을 밝히는 시간 문서가 가득 든 가방을 짐을 멜 수 있는 관절에는 모두 싸들고 퇴근하는 길, 내 돈 주고 택시를 타면서도 결제하기 버튼 바로 옆에 있는 할인쿠폰 글씨를 읽지 못해 할증된 금액을 고스란히 내는 일이 그랬다. 개인적인 일은 짧은 시간 안에 ‘해치워야’하는 것들로 라벨링 되었는데, 이것을 적절히 해치우기 위해 모든 것의 중간값을 예상하여 적어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인생이란 마음이 급한 누구에게나 그렇듯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데, 이럴 때면 울분에 차서 어떻게 할 줄 모르고 꽉 쥔 주먹으로 내 가슴만 쳤다. 희로애락 중 희와 애와 락은 일할 때 모두 소진하고 나의 삶에 남아있는 것은 노뿐이다. 이렇게 순순히 삶에 노여움만 남기는 선택을 하는 스스로가 슬펐다.
야근하고 온 날 밤, 풀리지 않는 피로를 몸에 담은 채로 누워 값싼 유희를 쫓는다. 정신만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선 잠이 오지 않는다. 몸을 함께 쓰거나, 눈을 피곤하게 만들어 더 이상 뜰 수 없게 만드는 방법만이 잠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나는 후자를 택한다. 아직 야근의 한가운데에서 겨우 숨만 붙어있는 중에는 끝도 없이 하고 싶은 일들이 해야 하는 일들과 뒤섞여 떠오른다. ‘짐만 들었을 뿐인데 어깨에서 뚝한 소리가 났던 일을 떠올리며 글을 써야지’하는 생각은 금세 ‘내일까지 시스템 A에 외근 다녀온 날짜를 입력해야 한다’에 잡아 먹힌다. 외근 다녀온 날짜와 함께 담당자 변경에 대한 일자를 입력해야 한다. 하지만 담당자 변경에 대한 일자를 입력해버리면, 보고서를 쓰는 시스템 B에 대한 접근이 끊기니 이건 보고서를 마무리 지은 다음에. 메모장을 열어할 일을 써두어도, 고장 난 테이프처럼 자꾸자꾸 같은 일이 마치 처음 기억한 일처럼 생각난다. 일에 대한 생각은 점성이 강해 한 번 시작하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또 의미 없는 릴스와 틱톡 챌린지를 스와이프, 스와이프 한다. 허무한 웃음 한 번이라도 웃으면 성공이다. 바닷속에 머리까지 담그고 파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중에는 긴 영상이나 벽돌 책을 볼 여유가 없다. 서로 현란한 춤을 바꿔 추는 아이돌의 영상과 콜라에 멘티스를 넣어 풍선을 부풀리는 영상이 숨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에는 훨씬 수월하다. 오래된 친구에게 입을 맞추거나 중국의 알 수 없는 길거리 간식 영상으로 채워진 눈꺼풀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