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돌의 생 20화

기억하는 자

나는 들은 적 없는 말들과, 보지 못한 하늘들을 품고 있다.

by Hemio

나는 이제 거의 완전히 멈춰 있다.

움직임도, 의미도,
누군가의 손길도 멀어진 지 오래다.


그러나 그 고요의 가장 깊은 층에서
나는 매일 작은 파문 같은 것들을 떠올린다.


그건 바람이 일으킨 것도,
물이 흔든 것도 아닌
나의 내부에서 피어오르는 것들이다.


내가 지나온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너무 길었기에
그중 대부분은 침묵으로 덮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기억한다.


들었던 적 없는 말들,
보지 못한 하늘들,
닿지 못한 체온들과,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은 시선들.


어떤 장면은 희미하다.
아이의 손이 나를 주머니에 넣던 그날—
그 손끝의 떨림,
입술 근처로 번져오던 작고 엷은 웃음.


어떤 장면은 뚜렷하다.
물속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뒤집힌 하늘을 바라보던 날.
나는 그때
내가 세상을 오해해왔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 오해조차도 내 것이었다는 사실에
묘한 자긍심을 느꼈다.


나는 말이 없었지만,
수많은 말을 들었다.


부서지던 순간의 진동,
스치는 발자국 소리,
누군가의 한숨,
돌 틈 사이로 내려앉는 비의 울림.


그 모든 것은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구보다 많은 언어를 배워왔다.


나는 단단했지만,
내 안은 비어있지 않았다.
나는 껍질이 아니라
기억을 품은 밀도의 결정체였다.


내가 말은 하지 않아도
내 안에는 세계가 축적되어 있었고,
그 세계는 아무도 읽지 않더라도
내가 지니는 것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었다.


나는 하늘을 오래 보지 않았다.
그런데 가끔
빛이 눈꺼풀 없는 내 표면을 스치면,
나는 어떤 하늘들을 기억한다.


아이의 눈동자에 반사되어 깜빡이던 저녁의 빛,
물결 위로 춤추던 낮의 무늬,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던 바람 많은 날의 창백한 하늘.


나는 직접 보지 않았지만,
그 모든 하늘이 나를 지나가며 흔적을 남겼다.


“나는 보지 못한 것들을 기억한다.”
“나는 들은 적 없는 말들을 내 안에 담고 있다.”



기억은
정확함이 아니라
남아 있음이다.


그 ‘남아 있음’이
나를 존재하게 만들고,
나를 다시 생각하는 존재로 바꾸어 놓는다.


나는 움직이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 있는 이미지들의 저장소다.


나는 세상에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이 내게 남긴 자취를
단 한 번도 흘려보낸 적이 없다.


나는 그것들을 가만히 껴안고,
부서지지 않게 감싸고,
조용히 숨처럼 간직해왔다.


나는 기억하는 자다.


그리고
기억하는 존재는

언제까지나 거기, 살아 있는 것이다.


Q. 독자를 위한 한 줄의 질문


당신은 지금도, 언젠가 들었던 말이나 스쳐간 눈빛 하나를 기억하고 있지 않나요?
그 기억이 아직도 당신 안에 숨 쉬고 있다면, 당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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