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 오프로드의 즐거움 : 전기자전거
뭐든 첫 단추가 중요하다. 하루의 시작도 그렇다.
나 같은 경우엔, 판교역에서 내려 제2판교가 있는 회사까지 가야하는데 그 길이 까마득하다. 말이 제2판교이지, 이건 판교와 동떨어져도 너무 동떨어진 것이다. 판교가 IT의 본거지 느낌이고, 한국의 실리콘밸리(지금은 실리콘밸리가 망하게 생겼대요!) 성격이라 너도나도 쉽게 판교 이름을 빌려 쓴다. 마치 호박나이트에서 조용필 이름을 따라한 웨이터 조용팔을 보는 것과 비슷하달까. 사실 제2판교는 분당구도 아니고 성남 수정구이고, 판교보다 서초구 양재가 교통편이 편리하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친한 인사팀 직원에게 직원을 뽑을 때, 회사 위치가 판교에서 가깝다 설명하는 것보다, 서울에서 통근 버스 15분(사실임!)이라고 서울권역으로 어필해 보라고 조언도 했다. 판교권역보다 서울권역이 어필하기 좋지 아무렴.
판교역에서 제2판교까지 대중교통으로는 30분, 회사 셔틀은 20분, 뛰면 30분, 자전거로는 15분이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테스트 해 봤다. 비슷한 경로로 다니더라도,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기분이 사뭇 다르다. 창의력 개발을 위해서라도 가끔은 매일 다니는 길을, 다른 교통수단과 다른 경로를 이용해 볼 일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자전거를 택했다.
실제로 자전거 출근의 효과는 상당했다. 처음 일주일은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마치 소풍 전날의 들뜬 초등학생 마냥, 출근길이 기다려지는 신비로운 경험도 했다. 늘 버스만 타서 몰랐는데, 탄천길을 라이딩하니 졸졸 흐르는 개천도 예쁘고, 탄천에 사는 물고기들, 왜가리 같은 이름모를 새들, 바람에 살랑이는 들풀들, 그리고 슬며시 흐르는 땀방울까지. 뭔가, 미생에 나온 장그래가 체력을 기르기 위해 매일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나도 프로페셔널한 회사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하루 시작의 워밍업을 산뜻하게 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왜 이 좋은 걸 그동안 안타고 다녔는지, 멍때리며 유튜브나 쳐다보던 과거의 나 반성하고 자중해!! 다만, 이 즐거움은 안타깝게도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마침 비오는 날이라, 자전거 대신 셔틀을 타기로 마음을 먹고 전철에서 내려 후다닥 셔틀 정거장으로 뛰었다. 어찌된 일인지 기사님은 뛰어오는 나를 백미러로 본 듯 한데, 모른채 엑셀을 밟고 출발해 버린다. (내 오해입니다.)
지각을 면하려면, 다른 방법은 없어 자전거를 타고 사무실에 도착해 수건으로 빗물을 닦는데, 흐르는 건 빗물인지 땀인지, 눈물인지. 기회만 된다면 당장, (실은 능력만 된다면) 집 근처로 회사를 옮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면 회사 근처로 집을 얻던가.
자연의 농락(비, 눈, 얼음, 강추위, 강더위 등)과 권태를 잘 이겨내면 자전거 출근은 15분동안 충분한 즐거움을 준다. 마지막 5분의 라이딩 구간은 비포장 길이라 예상치도 못한 익스트림 스포츠의 즐거움도 준다.(엉덩이 아프다는 말) 자전거 출근 중간중간에 때로, 악천후 러닝을 곁들인다면, 이건 회사를 오는 것인지 헬스장을 오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을 것이다. (악천후 러닝은 아직 안해봄)
이 부분은 생각지도 못한 자전거 출근길의 장점이다. 우리가 바라는 목표는 회사 출근길을 하이킹(회사가 산으로 가는 중이니 아예 없는 말은 아님)이나 헬스장 가는 길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면 회사간다는 생각에 잔뜩 구겨졌던 인상이, 회사 가는 거 아니야 산에 하이킹 가는거야로 생각만 바꿔도, 어느새 얼굴이 활짝 펴지는 경험마저 하게 될 것이다. 회사 도착해 업무 시작 전까지 시간이 좀 남는다면, 회사 샤워실을 활용해 땀을 씻고 뽀송하게 하루를 시작하면 더 좋다.
복직에 앞서, 출퇴근길을 걱정하는 내게 삼모전자에 다니는 내 친구 제이는 본인이 쓰던 전기자전거를 선뜻 선물로 주었다. 사용 거리는 불과 200km에 남짓한 민트급이다. 자전거를 인계받던 날, 나는 고마운 마음에 양고기와 고량주를 양껏 친구와 먹었다. 술과 고기에 쏟은 돈이면, 중고로 자전거를 얻는 가격과 진배 없어 배보다 배꼽이 더 컸지만, 이렇게 우리는 또 우정을 과시하는 것이지.
제이는 삼모전자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인간 관계와 경쟁에서 오는 번아웃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제이의 친한 후배가 제이가 짠 코드를 변수만 바꿔서 최종 수정자로 자신의 이름을 올렸던 일이 있었다 한다. 달리 말하면 도둑질이지. 성과를 훔친 것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경쟁이 심한 조직에선 40대 중반이 견디기 힘든 부분이 있다. 압박을 느끼는 지점은 대개 직책을 맡느냐 여부와 성과를 젊은 사람들보다 어떻게 더 내느냐 하는 부분이다. 나이가 있는데 그에 따른 직책이 없으면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고, 주요 업무에서 권한이 박탈되기도 한다.
현모자동차 그룹은 구 보직자 현 팀원인 나이든 부류의 인원이 많아, 나이든 사람이 느끼는 심적인 압박이 덜하고, 성과 주의의 치열한 경쟁에서도 비교적 타사보다는 자유로운 편이다. 내가 비록 사회학자는 아니지만, 이는 아마도 성과급 지급 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추측한다. 삼모전자는 능력에 따른 차등 분배가 확실한 편인데, 현모자동차그룹은 노사 합의에 의해 성과급이 결정되면 모두에게 동일한 금액이 지급되는 방식이다.
나이든 사람이 느끼는 압박감, 이 부분을 상위 리더는 지속적으로 파고든다. “성과 좀 더 내셔야죠.”라거나,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이셔야죠.” 같은 말들. 알게 모르게 슬쩍 던지는 이 말들이 나로 하여금 더 많이 고민하게 하고 더 오래 사무실에 남아 일하게 하는 동력이 되게 한다. 맞다. 은근한 가스라이팅이다. 무던한 사람은 모른 척 잘 넘기기도 하던데, 자존감이 세거나 예민한 사람은 그런 종류의 압박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나도 전 IT 회사에서 리더와 면담을 할 때, “이제 뭔가 성과를 보여줘야죠”, “다른 사람들은 쎄오님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몰라요.” 하는 말들을 들었는데 그게 어찌나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던지. 내가 리더와 약속한 KPI 항목들은 잘 해냈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획기적으로 한 획을 그을만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만한 성과는 없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모 커뮤니티에서 40대의 무게감이라는 게시글을 본 적이 있다. 40대가 되면 여기저기 아픈 곳이 도드라지게 나타나기 시작하고, 연로한 부모님은 편찮으시고, 또 학령기 자녀들에게 쏟아야 하는 돈은 늘어나고, 회사에서 중간 관리자로 위 아래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부동산이나 주식 등 챙겨야 할 재테크 목록은 많고.
보드게임 젠가처럼, 까딱 잘못해서 하나라도 잘못 빼는 경우엔, 그동안 힘들게 쌓아왔던 일상이 와르르 무너져버릴 수 있다. 직접적으로 언급은 하지 않지만,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동일한 종류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동질감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친구 제이도 비슷한 압박으로 인해 결국은 오랜 삼모전자에서의 회사 생활을 끝내고, 해외 시스템 도구사로 이직을 했다.
40대가 넘어가면 ‘내가 이 회사에서 내 자존감을 버리지 않고 정년까지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한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그깟 자존심을 지키는게 뭐람' 하면서, 생각을 고쳐 먹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