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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간다는데 두 시간이 대수야

언제나 먹을 생각 : 국밥에 소주

by 꼬르따도

회사는 맛집이라고 최면을 건다. 전에 일산에서 분당까지 편도 2시간이 넘는 출근길에도 이렇게 마인드셋을 했다. 나는 지금 출근하는게 아니라 맛집에 가는 거라고. 이걸 요샌 원영적 사고라고 부르던데, 내가 먼저 시도했고 내가 먼저 태어났으니 여기서는 쎄오적 사고라고 부르기로 하자.(사실은 정신승리 아니냐고.)


실제로 전 회사는 회사밥이 진짜 맛있는 편이었다. 게다가, 회사 5층에는 외부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외식업체를 6곳 정도 선정해서 구내 식당에서 먹는 대신에, 회사 제공 식대로 사먹을 수도 있었다. 맛있는 걸 먹으러 간다는데 두시간이 대수야, 요새 애들은 두시간 동안 찾아가서 두시간 동안 줄을 서서 먹기도 한다는데 라고 생각하면 출근길 두시간이 그나마 견딜만 했다.


그러니 당연히 일주일이 시작되는 때면 그 주일의 점심/저녁 식단을 꼼꼼히 살피고, 여러번 들여다봐서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암기가 됐다. 늘 머릿속에 먹을 걸 생각하다 보니, 회의시간에도 쎄오님 방금 나온 UX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은 어떻게 되나요? 라는 물음에 하마터면 개인적으로 닭도리탕 좋아합니다. 맛있죠 라고 대답할 뻔. 이건 오바고, 그 정도로 나는 회사의 식당을 애정했다.


유퀴즈에 나온 모 중소기업 영양사님의 영상 클립에, 밥만 맛있어도 회사 갈만하다는 댓글이나, 저 회사 다닐 맛 나겠다는 댓글들이 농담섞인 빈말만은 아니다. 회사의 경영진은 이 부분을 간과하지 말고, 경영실적 부진으로 예산을 삭감해야 할 때, 식대를 먼저 고려하는 오판이 없길 빈다.


집이 멀어, 회사에서 반드시 저녁을 먹고 퇴근을 하는데, 그럴때 혼자 먹는 저녁 시간이 내겐 힐링의 시간이었다. 음식과 나만 남은 순간. 먹는 행위에 한껏 집중하면서 음식의 맛을 오물오물 음미하면, 그날의 피로가 풀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구내식당이 지하 1층이었는데, 저 멀리 뉘엿뉘엿 지는 석양이 식당을 주황빛으로 물들일때면 하루를 마감하고 만선으로 귀가하는 어부의 보람과 비슷한 감동마저 느꼈다. 오늘 하루 수고 많았다, 내 자신.


그리고 하루 일진이 좋지 않고, 일이 너무 많거나, 기분이 꿀꿀한 날엔, 일부러 가장 좋아하는 국밥집에 가서 국밥에 소주 반 병을 기울이곤 했다.(한병은 너무 많다. 한 병 먹고 집에가면 아내에게 들킨다. 하지만 반병은 주시후레시 껌 세개 정도 먹고 들숨날숨 잘 컨틀롤 하면 티가 나지 않는다.)


프로젝트가 지연된다거나, 합의했던 정책이 갑자기 바뀐다거나 때론 내가 놓친 실수 때문에, 때론 의사소통 이슈 등에 의해 마음이 상하곤 했는데, 국밥에 소주 반병이면 그런 마음이 어느새 ‘아무렴 어때’ 라고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다. 판교에는 무려 판교의 역사와 시작을 함께하는 판교가 본점인 순댓국밥집이 하나 있다. 들어가면, 판교가 개발되기 시작하던 순간의 사진들이 역사 뮤지엄의 그것처럼 전시가 되어 있다. 판교의 등대를 자처하던 IT 회사와 게임회사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따끈한 국밥과 소주 한잔으로 달래주던, 판교에서 유서깊은 소중한 해장국집이다. (마치 '한국인의 밥상'의 최불암 선생님의 나래이션이 떠오르는 문장이다.) 요새 분당에는 광O문 국밥이나, O현순대 처럼 이름만큼이나 깔끔한, 호불호가 없을만한 스타일의 국밥집이 많은데, 내 취향은 그보다는 조금은 쿰쿰한 냄새가 나고 작업복 입고 국밥을 마시고 있는 아재들이 상주하는, 성시경이 '먹을텐데'에서 추천해준 스타일의 국밥집이 좋다.


성시경이 국밥에 소주는 나라가 허락한 마약이랬는데, 그 말이 맞는지 따뜻한 국밥과 알딸딸한 소주가 몸속에 들어가면 마음이 나른해지고 그 무엇도 괜찮은 기분이 든다.


지금의 회사 근처는 제2판교가 들어서고 있는 순간이라, 사방이 공사판이고 이렇다할 상가는 아직 들어서지 않았다. 근방에 끼니를 때울 곳은 있으나, 즐길 만한 맛집은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맛집 지도를 개척해야 하는 순간인 것이다. 불모지인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개척하던 침탈자 유럽인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저녁 시간이면 가끔 걸어서 20분 이내 음식점을 방문하고, 나만의 맛집 지도를 그린다. 그리고선 회사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이다. 저쪽 다리 건너편 제2판교에는 쭈꾸미 맛집이 있어요, 네이버 평점도 꽤 좋고요, 실제로 먹어보니 적당히 맵고 달큰해서 굳이 가서 먹을 정도는 됩니다. 먹어본 인생 쭈꾸미 세 손가락 안에는 들 정도예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유럽에 돌아와서 “저쪽 아메리카에는 글쎄, 원주민들이 옥수수, 고구마, 감자, 틈메이러를 먹지 뭐예요. 조금만 먹어도 상당히 배가 든든합니다요.” 하며 새로운 작물들을 유럽에 전파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맞은편 개발이 완료된 제2판교 동쪽의 맛집들을 동료들에게 속속들이 알려 주는 것이다.


이렇게 나만의 맛집 지도의 영역은 점점 넓어진다. 회사 주변, 출근길 전철역 주변, 출장지 주변 등등. 맛집을 끊임없이 발굴하다보니, 네이버 지도에 애정하는 식당으로 갈피해둔 식당의 갯수가 늘어나고 범위가 넓어져서 찐맛집이 다소 희석된 느낌도 들지만, 출장길이면 어김없이 애정하는 맛집 들릴 생각에 발걸음이 가볍다. 짜증나는 상황도 이따 저녁에 맛있는거 먹고 풀어야지 하는 생각에 기분이 금세 전환된다. 이게 바로 회사 주변에 나만의 맛집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회사는 맛집을 가기 위해, 잠깐 들려 짬을 내서 일하는 곳이다. 실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는게, 일터에 가는 가장 큰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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