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34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뿌리가 없어도 누구보다 푸르른

식물 키우기

by 꼬르따도 Mar 23. 2025

1999년 수능날이었다. 1교시 언어영역 시험을 보던 중 급한 요의가 느껴졌다. 참고 계속 시험을 보다가, 아직 남은 시간을 보니 지금 당장 화장실에 다녀오는게 마음 편히 시험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히 손을 들고, 선생님께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


선생님은 내 자리까지 오더니, 시험지와 OMR 카드를 뒤집어 두고 나를 후문으로 인도했다. 복도를 관리하던 선생님을 손짓으로 불러 나를 그분에게 인계를 했다. 복도에 계신 선생님은 천천히 내가 있는 곳까지 와서(마치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에선 내 옆에 바짝 붙어서서 내가 오줌을 누는지, 혹시 다른 행동을 하지는 않는지 두눈을 부릅뜨고 밀착 관리를 했다.  


옆에 누가 바짝 붙어 오줌을 싼다고 생각해 보자. 오줌이 잘 나오나.


아무튼 그렇게 급한 요의를 해결하고, 자리로 돌아와 문제를 마저 풀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시간때문인지 시간이 다소 빠듯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문제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압박감에 제대로 못 풀고 찍고 말았다. 시험을 마치고 다음날 학교에서 나눠준 답지와 비교해보니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였다.


결국은 그 한문제 때문에, 서울대 약대에 떨어지고 재수를 선택했다. 언어영역 점수는 내 고등학교 3년간 처음으로 맞아본 점수인 107점이었다. 한 번도 110점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근데 2000년 대입 수능시험은 언여영역이 유독 어렵게 출제된 해였다.


**


재수학원을 다닐 돈은 없었다. 운좋겠도 수능 점수가 좋았기 때문에 서울 강남 소재의 학원에선 학원 홍보를 목적으로 전국 3% 이내의 점수를 가진 수험생들은, 수업을 무료로 수강을 할 수가 있었다.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꼼짝없이 학원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형수님은 도련님을 위해 도시락을 싸줬다.


강남에 있는 학원이었고, 나는 낯을 심하게 가리는 대문자 I의 시골에서 올라온 재수생이었다. 다른 재수생들의 옷차림과 맛난 반찬이 가득든 도시락 등 나는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스스로 위축되어 갔다. 다른 아이들은 다 깔끔하고 멋져 보였다. 사투리도 쓰지 않고,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서울말(표준어 정의)을 구사했다. 나는 하루종일 입 한 번 떼지 않고, 맨 뒤에 앉아 말 그대로 공부만 했다. 형 집에서 지냈는데, 이제 세살된 조카가 있었고, 형수님의 외할머니가 계셨고, 나는 거실에서 지냈다. 공부에 집중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오월이 됐다. 3월 부터 시작된 모의고사에선 세 달 연속으로 390점을 넘겼다. 어느 시험은 전국 10등안에 들기도 했다.(시험 응시자가 많지 않은 시험이었다.) 그래, 이쯤되면 혼자 공부해도 되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밀폐된 학원에서 주눅들면서, 더 이상 숨막히게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먼저 손을 내민 재수생은 있었는데, 빅 I인덕에 그 손을 잡지 않았다. 그 때까지 친한 친구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학원을 그만뒀고, 서울 남산 도서관을 주 공부장소 삼아, 혼자서 재수를 마무리 했다. 결국 원하는 점수를 얻지 못했다. 점수는 올랐는데 퍼센티지가 떨어졌다. 2001년 대입 입학 수능 시험은 이례적인 물수능이었고, 만점자가 속출했다. 한 문제 맞고 틀리고에 따라 그 점수 사이에 수만명이 있었다. 나는 외국어영역에서 듣기 평가를 두 개 틀리는 바람에 수능을 망치고 말았다. 혼자서 공부한 때문에 듣기 평가에 소홀했다는 게 내가 내린 실패의 원인이다. 듣기 평가 하나를 놓쳤는데 당황한 나머지 다음 문제까지 놓쳐 버렸다. 나의 수험생활에 서울대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딱히 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어 무슨 학과에 가야지 하는 목표는 없지만, 서울대를 가는 것만은 분명한 수험생활의 목표였다.


실망한 나머지 삼수를 생각하며 고향에 칩거하던 중, 원서 제출 마지막 날 형이 서울로 불렀다. 그리고선 형 교회 후배들에게 부탁하여, 그 날 내 점수로 갈 수 있는 곳곳에 원서를 하루만에 다 제출했다. 그렇게 K대에 턱걸이로 들어왔다.


**


인생은 단 한문제 차로 가는 길이 아예 달라지기도 한다. 약대에 갔으면 내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가끔 상상한다. 사실 약대에 가려는 목적인 분명하였다면, 서울대 말고 중앙대나 성균관대라는 선택지도 있었다. 약대를 딱히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서울대를 간다면 약대였고, 다른 대학들은 전부 한의대를 선택했다. 의약계열로 가려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기 때문에 피를 덜보는 곳은 아무 곳이나 괜찮았다. 의대만 아니면 된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약대와 한의대만 지원했다.


일이 안되려고 하면, 안되는 법이다. 당시 지원한 한의대는 담임선생님과 협의하여 다 안정권으로 넣었다. 1999년도에 MBC 허준의 열풍이 없었다면 나는 무난하게 지금 한의사의 길을 걷고 있을 지도 모른다. 심지어 허준 촬영지는 순천의 낙안읍성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소재지와 동일하다. 당시 급식실에서 밥을 먹다가 희대의 탈옥자인 신창원이 학교 근처에서 잡혔다는 뉴스를 보기도 했다.


그해가 유일하게 경희대 한의대가 서울대 의대 입학 점수를 넘기던 해였고, 전국의 한의대가 최고점을 찍던 때였다.


**


대학교에서 아내를 만났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웃음을 주는 아이들은 결혼을 통해 얻은 사랑의 결실이다. 우스개 소리로 '아, 내가 그때 서울대 갔으면 다정하고 더 예쁜 아내 얻었을텐데.' 농담처럼 말하지만, 사실 지금보다 더 현명하고 예쁜 아내를 만날 자신이 없다. 오답지만 골라서 선택하고, 불운의 연속인 삶에 아내를 만나고 가정을 일군 건 하나님이 내게 주신 한 줄기 빛이자 동아줄이 틀림없다


낮은 자존감은 일터에서도 발휘된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 본 적이 많지 않기에, 내가 필요하다는 팀장과 재무, 영업, 개발팀의 요청들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연구기획팀에서 말 그대로 내가 지원 업무의 허브 역할을 했다. 재무 숫자를 바꾸는 단순한 작업 조차도, 처음과 끝은 내 손끝이었다. 구매 검토 보고서도 내 손을 탔고, 과제심의, 투자심의 사전 검토도 다 내가 최초 게이트 점검을 했다. 영업에서 해야 할 과제 정의와 수주, 매출 산출도 내 손을 탔다. 사업계획 업무와 계획 대비 실적의 월간 레포트도 다 내 차지였다. 이상하다, 이걸 왜 못하지, 하는 마음이었고 나이 드신 시니어들에게 설명하느니 내가 바로 끝내는게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내가 맡은 업무들이고 5년간 업무를 지속하자 각종 비효율들을 개선하고 프로세스가 표준화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업무를 시스템으로 구축했다. 지금 쓴 이 문단들에 회사생활에서 하지 말아야 할 온갖 실수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천천히 지쳐갔고, 갑자기 폭발했다.   


**


힘들었다. 격무에 시달렸지만 팀장은 일을 더 내게 던졌고 나에 대한 배려는 었다. 사람들은 팀장이 곧 임원이 될 거라고 했다. 나 하나로 지원 부서의 허브를 완성했으니, 그는 매 조직개편 때마다 나를 본인 팀원으로 제일 먼저 선택했다. 마치 초등학ㄱ생시절 오징어게임을 할 때 에이스를 제일 먼저 선택하는 것처럼.


그러다가, 이 격무에 테크데이 행사까지 더해졌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H사 본사까지 가서 새벽까지 우리 회사에서 만든 제품군들을 홍보하는 부스를 만들어야 했다. 나는 이 업무에서 빠지기로 했는데, 어인 일인지 팀장은 나까지 포함했다. 어제 야근한 사람을 일요일에도 부른 것이다. 나는 일요일에 교회를 가야 하는데도. 옆에 팀에 같이 들어온 동기는 하루 날을 새면 다음 날 재량껏 팀장이 하루 회사를 쉬게 해줬는데 나는 걔보다 10배는 더 일을 하는 듯 한데 새벽 네 시에 퇴근해도 다음 날 8시까지 출근했다. 배려는 없었다.  


어느 순간 이런 부조리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게다가 결혼 준비도 해야 하는데, 업무가 바빠 결혼 준비는 오로지 아내의 몫이었다. 채찍만 있고 당근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업무 빵꾸로 욕만 듣지 않으면 다행인 나날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더 시달렸다. 나는 분명히 이제 이 업무와 이별을 하고 싶다고 팀장에게 말을 했다. 조직개편이 되었고, 나만 빼고 다른 인원들은 다 다른 팀으로 배정을 받았다. 다른 팀으로 떠난 구 동료들이 너무 부러웠다. 내 눈에는 그들은 늘 웃고 다닌 듯 했다. 나는 표가 나게 불만을 터뜨렸다. 나도 지금의 팀장을 떠나고 싶었다.


마침 시험관 시술을 통해 어렵게 첫째가 태어났다. 팀장이 애정하는 다른 팀원들도 비슷한 시기에 첫째가 태어났다. 팀장이 개설한 단톡방을 통해(팀장만 제외된 단톡방에서 우리끼리 이미 축하를 했음에도 불구) 다른 팀원의 아이가 탄생한 것에 대해 팀장을 통해 대대적인 홍보와 축하를 받았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선물도 받았다. 우리 아이는 팀장을 통한 축하도 못받고, 회사에서 지원받는 선물도 없었다. 선물은 몇 달후 내가 신청해서 챙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라고 믿었다.


어느 날 밤새 보채는 첫째를 안고 있는데 팀장에게 당한 일 때문에 억울해서 이 아이에게 사랑을 충분히 주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머리에 번개가 치는 듯 전기가 번쩍 통하는 느낌이었다. 내 머릿속은 온통 회사일과 억울한 일에 대한 서운함으로 가득했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마침 육아휴직이라는 카드가 생각났고, 그 즉시 잠든 아이를 내려놓고, 팀장 너와 일을 더이상 하기 싫다는 메일을 보냈다. 파트리더 두명을 참조로 넣었다. 효과는 굉장했다.


**


회사에 출근하면 맨 먼저, 내 자리 앞에 있는 화초에 물을 준다. 그 물은 어제 먹다 남은 물이다. 그리고선 일리터짜리 텀블러를 깨끗이 씻고 거기에 물을 다시 가득 채운다. 오전에는 이 물을 다 마실 참이다. 하루에 이렇게 오전 오후 물을 다 마시면 2리터를 먹는다. 지난 해 몸 어느 한 곳이 고장나서 스테로이드 치료를 받았는데, 치료 후유증이 너무 심해 병원에서는 하루에 물 2리터 먹는 숙제를 줬다. 카페인을 줄이고, 대신 물을 실컷 먹게 되었다.


집에 있는 것보다 회사에 있으면 더 규칙적이고 건강한 생활을 하게 된다. 회사 일이 재밌고 즐거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일부러 물을 뜨러 가는 구실로 자리를 비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루하면 팔굽혀 펴기도 하고 영어 회화도 하고. 그렇게 시간을 사용해도 남들 담배피러 가는 시간의 총합보다는 작은 시간이다.


산책 중에 동백나무를 닮은 긴 가지를 하나 회사에 주워왔다. 가로수 전지 작업을 위해 짤린 부분이다. 내 자리 앞에 있는 화분 흙에 대충 그 가지를 꽂아뒀다. 그리고 아침마다 옆에 있는 나무에 물을 주면서 그 가지에도 물을 줬다. 가지는 몇 달이 지나도 푸른 색을 유지하고, 하늘을 향해 잎을 뻗었다. 시들지 않았다.  


아, 이렇게 해도 나무는 자라는구나. 뿌리 없이 가지만 꽂아도 이 식물은 자리를 잡고 열심히 자라나는구나. 식물의 생명력이란 놀랍다,싶어 가지를 뽑아 봤는데 힘도 들이지 않고 가지가 흙에서 쑥 빠진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뿌리가 없다.


원효대사 해골물일까. 아침마다 잘 자라라고 정성껏 물을 뿌렸는데 그 덕일까. 뿌리가 없어도 정성을 다해 물을 주면, 말라 죽지는 않는다. 잎이 시들지도 않고 잎사귀가 바닥을 향하지도 않는다.


이날 이후 회사에 있는 다른 화초들에도 물을 주기 시작했다. 뿌리가 없어도 정성을 다해 물을 주면 죽지는 않는다. 뿌리가 있지만 시들어 있던 나무들은 도로 활기를 찾는다.


내 지난 회사생활도 돌이켜 보면 뿌리가 없었다. 상처 받은 덕에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고, 업무도 기획 내에서 조금이라도 더 경쟁력이 있는 업무로 옮기기도 하고, 연봉이나 직급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리더가 되고 싶었지만, 텃세 덕에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핑계고,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이다.) 하지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이 시간들을 붙잡기 위해, 회사에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노하우를 기반으로 업무들을 효율화하는 노력을 했다. 하던 대로 하는 업무들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봤다. 이런 노력들이 뿌리는 없지만 내가 뻗은 가지들이 시들지 않게 했다고 믿는다.


수험생활에도 딱히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구체적인 목표가 없었다.


지금도 회사에서 딱히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이 말은 어쩌면,  

사실 회사에서 누구보다 되고 싶은 것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는 의미일까.


목표는 없지만, 뭐라도 되겠지 하는 마음에 끊임없이 물을 주기는 했다. 그 덕에 시들지는 않았다. 대충 툭 흙에 꽂아뒀지만 아직까지 살아 남았다. 언젠가 꽃을 피면 더 좋겠지만.

 

이전 18화 가끔은 필름 카메라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