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안일한 긍정

by 꼬르따도

그제는 아들아이 어린이집 면담을 위해 이른 퇴근을 했습니다. 사실 이른 퇴근을 위해 이른 출근을 했습니다. 7시 출근 4시 퇴근을 한 셈인데요. 이렇게 출근을 하면 딱 8시간 근무를 하게 됩니다. 7시까지 출근하기 위해 새벽 5시 30분에 집에서 나왔습니다.


이른 출근을 하다보면 남들 자는 시간에 일찍이 일어나 미리 준비하는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회사 식당이라든지, 회사에서 사용하는 샤워실이라든지, 깨끗한 회사 로비라든지.


회사에 국한되어 말하긴 했지만, 전철, 거리, 차도 등 우리가 사용하는 인프라 서비스들이 다 멀끔합니다. 누군가 간밤에 찐한 술을 마시고 남겨놓은 흔적이나 담배꽁초 커피잔 등 거리 이곳저곳 어지럽혀둔 곳들이 모두 깨끗해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길에 새삼 감사함을 느끼는 오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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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부터 이른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눈을 뜨면 고양이세수를 하고 바로 회사로 직행합니다. 씻는 일은 회사 샤워실을 이용합니다. 새벽 6시 전에 집을 나서기 시작했는데 낮이 길어져서 밖이 환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고 제일 좋아하는 달(month)입니다. 판교역에서는 자전거를 이용해 회사에 도착합니다. 자전거 타는 시간이 20분 정도 되는 듯 해요. 에브리바이크라는 저렴한 공유 자전거를 이용하는데 에브리바이크는 기어가 없어 유산소 운동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광고 소구 포인트도 유산소 운동으로 잡은 듯 해요. 걔 중 가뭄에 콩 나듯, 3단 기어 자전거가 간혹 있습니다. 유니콘으로 불릴 만큼 발견하기 힘든 자전거인데 일타로 판교역에 도착하면 늘 그 자전거를 만날 수 있어요. 아싸 럭키.


그 자전거를 타도 3.5km를 달려 회사에 도착하면 속옷이 땀으로 적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면 샤워실에서 팔굽혀펴기를 50개 정도 채우고 샤워를 합니다. 이 시간이 너무 좋아요. 내 몸에 잘하는 짓 같기도 하고. 오래전 봤던 영화, 공동경비구역에서 이영애가 판문점 총격 사건 조사를 맡았는데, 사건에 몰입해 복잡해진 머리를, 아침 조깅으로 해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침에 운동할 때 간혹 그 장면이 떠오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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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왜 일찍 출근하게 되었냐, 하면 그건 또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요새 수출 위주의 제조업 사업들 상황이 좋지가 않습니다. 우리 회사도 예외가 아니구요. 팀장이 어느날 면담을 하더니 OT(over time) 좀 높여 달라고 하더라구요. 임원들이 각 팀별로 OT 비율을 보고선 우리 팀이 비교적 낮더라고 했답니다.


예전에는 그런 말들에 21세기에 그게 가당키나 한 조직관리냐 같은 말들을 얹었겠지만, 나이가 드니 보직자의 고충을 알기에 고분고분 따르기로 합니다. 오후 시간엔 그제처럼 아이들 케어에 관련된 시간이 필요할 때가 많아서 그렇다면 일찍 출근하는 수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사업이 좋지 않으면 수주를 늘려야 하지만 인력 채용에는 소극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인원들 활용해서, 쥐어짜서, 더 많은 일을 해 내는 수 밖에 없겠죠. 팀장의 요구사항을 듣자 마자 경영진들의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머릿속에 바로 떠올랐습니다. 사정이 좋지 않나 보다, 하고. 거기에 더해, 쥐어 짜도 지금 인력들이 이탈 할 수 있는 확률도 적습니다. 동종 업계 채용 시장이 꽁꽁 얼어 붙었거든요. 그런 계산식이 어느 정도 있었을 법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생각을 뺏기지 않기로 합니다. 삼삼오오 모이면 어려운 상황을 얘기하며 회사의 결정에 불만을 터뜨리지만, 저는 한발짤 거리를 두는 방법을 택합니다. 그리고 좋아지겠지 안일한 긍정을 선택합니다.


떠나온 회사들 모두 어려운 순간이 있었지만 결국 다 이겨내고 더 좋아지더라구요. 우리가 걱정하는 것과는 달리 어느 정도 규모가 있으면 다시 턴 어라운드 하는 상황을 여러번 목도했습니다. 저는 떠날 때 그런 상황을 연료삼아, 이직의 타당성에 대한 합리화를 했는데, 그런 합리화가 무색하게 지금 회사보다 예전 회사들이 더 잘나갑니다. 물론 저는 그런 시장상황보다 진급에 세 번 떨어져 이직한 이유가 크지만요.


결국 제자리에 있는게 요리조리 왔다갔다 하는 것보다 더 편하고 더 쉽고 더 안정적이고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제 경험에 한정해서 말하자면요.


그래서 보직자의 의견을 군말 없이 듣고, 따르기로 합니다. 그게 에너지 보존 측면에서도 유리합니다. 그리고 일찍 나오면 그거대로 건강에 좋고 활력있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요. 서비스를 제공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느낄 수도 있구요. 만약 회사 사정이 너무 안좋아져서 떠나라고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수긍할 마음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제 쉴 타이밍인가 보다 하면서 쉴 수 있는 마음. 아내도 납득가능한 명분이 있는 쉼입니다.ㅎㅎ


대신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바로 찾을 수 있게끔 준비를 차근히 해두려고 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하나의 뒷배 일 수 있겠네요. 심사를 나갈 수 있는 자격증을 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구요.


그래서 아직은 안일한 긍정을 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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