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풍뎅이면 충분해

by 꼬르따도

예전 회사 지인들과 저녁 식사 모임이 있었습니다. 일찍 모인다고 모였지만 평일 저녁에 세시간 정도 수다를 떠니, 벌써 열시가 되었습니다. 다들 바쁘니 일 끝나고 늦게 모인 영향도 있습니다.


이 시간되면 아내 얼굴이 술 잔에 어른 거립니다. 보고 싶어서도 맞는 말이지만, 그보다는 아내의 찡그린 미간이 먼저 떠오릅니다. 아내는 화가 나면 미간부터 찡그러지거든요. 많이 늦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무서워요ㅡ


모임의 주제는,

지금 회사를 떠나 더 작은 회사로 가도 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조언을 얻고자 산전수전공중전 다 겪은 대기업 이직 5회에 빛나는 아홉살 많은 선배님을 모셨습니다. 두 번이나 동일한 계열사에서 만나게 된 과거 회사 동료 C가, 작은 회사 면접에 합격하게 되어 아홉살 많은 선배님과의 미팅을 제가 알선하게 되었습니다. C로부터 요청이 있었습니다. 저녁은 내가 살테니 미팅을 만들어달라.


- 그 선배가 뭐라셔?

- 아 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직접 물어보든가.


그 날 모임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가지말고 버텨라. 아니면 내 꼴난다.


살아있는 증거, 그러니까 마치 살아있는 화석 실러캔스가 눈 앞에 있으니, C는 선배님의 회사생활 역사를 선사시대부터 되짚어보면서, 남겨진 화석을 어루만지면서, 과거를 통해 오늘과 내일을 예측하는 것처럼 잠자코 생각하는 시간을 갖더니 마침내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분의 말에 쉽게 수긍하고 면접 합격 이후의 진행 절차를 멈추기로요. 여기 이 회사에 계속 남아서 더 버텨 보겠다며 다시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 자 C책임 생각해봐. 니가 여기서 얼마를 받잖아. 근데 그 회사 매출이 100억이라며. 회사 직원은 50명이고. 단순 계산하면 인당 2억 매출인데 인건비 투자비 빼고 남는게 뭐가 있을까? 그 돈 주고 너를 데려가야 한다면 니가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 연구개발만 하게 될 것 같아? 아니지. 영업도 해야지. 만약 매출이 안나오면 누굴 제일 먼저 짜르고 싶을까? 대기업에 있어 모르겠지만 작은 기업일수록 더 악랄해. 법적인 보호를 못받는다고. 여기서보다 더 험한 꼴을 볼꺼야. 니가 돈을 못벌면 화딱지가 날꺼야 당장 짜르고 싶어서. 또 나이든 사람들 인내심이 많지 않아ㅡ 살 날이 많지 않거든. 지금 나이가 40대 중반이지? 내가 진짜 나가서 대박 한 번 쳐야겠다. 내가 이제 내 인생 배팅 한 번 해봐야겠다. 니가 나이가 어리거나 쌓아둔 돈이 많거나 아니면 어디 돈 나올 구멍이 있으면 그 도전은 아름답지. 그렇지 않으면 인생 난이도를 스스로 높이는 것 밖에 더 되냐고? 큰 회사는 숨어 있을 곳이라도 많지.


그 말에 내 일이 아님에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남의 얘기가 아니예요. 나이가 들면 숨어 있을 곳이 많아야 된다 (메모메모)


-


바로 오늘이죠. 재계 내노라하는 기업인들과 대통령과의 정재계 미팅이 있었습니다. 공개된 영상에는 재드래곤님이 대통령에게 말합니다. 저 대통령님 자서전 읽어봤어요!


댓글에는 '천하의 재그래곤도 사회생활한다. 더 열심히 살아야지!' 맞습니다. 우리는 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조금 자존심 상한다고 바로 회사생활을 때려치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회사를 때려치고픈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오면, 재드래곤이 대통령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세요. 그 분도 그렇게 사회생활합니다. 이런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어요. 그럼에도 말을 내뱉습니다.


'너 뭐 돼?'


-


술자리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니 시간은 자정 12시를 가리킵니다. 쥐죽은 듯 조용한 집안에 샤샤샥 샤샤샥 작은 소리가 들립니다. 소리에 이끌려 다용도실 문을 여니 장수 풍뎅이 한쌍이 곤충젤리를 먹으면서 정답게 놀고 있습니다. 모두 잠든 밤, 그 소리가 묘하게 반갑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곤충젤리 하나를 놓아줍니다.


누군가 그 정도로 반겨주면

심지어 그 존재가 사람이 아니어도,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조금은 샤샤샥 사라지는 기분마저 듭니다.


늦은 밤 귀가시간에 반겨주는 이가 사람이 아니라 곤충이어도 충분히 위로를 받습니다.


- (샤샤삭) 수고했다 주인놈아 곤충젤리 내놓아라


재드래곤에게 사회 생활을 배우고

장수풍뎅이에게서 위로를 받습니다.


눈치 챘나요?

자극을 받고 위로를 받는 대상이

내 친구나 직계가 아니어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쉽게 위로를 받습니다. 대신 내 인생 이게 뭐야 하면서 쉽게 비관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말이예요. 남과 비교하지 않고 단단하게 본인의 가치관을 정립하면 남이 뭐라든 저는 단단합니다. 가진게 없어도 보잘 것 없어도 내 스스로 나를 기특하게 여깁니다.


약간의 허들은 즐겁습니다. 견딜 수 있는 시련은 날 더 강하게 만듭니다. 상대적이지만 사람이 아니라 풍뎅이만 날 위로해주고 응원해주면 뭐 어떤가요. 다 괜찮고 다 견딜만 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풍뎅이에게 곤충젤리 하나 정도 놓아줄 수 있는 시간적 경제적 여유만 있으면 저는 아직은 괜찮습니다. 조금 더 나를 낮춰도 될 듯한 마음입니다. 까짓것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풍뎅이를 키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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