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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김나영 Apr 27. 2021

33 < 삶을 모두 마치고 나면 >

어릴수록 자주 참석하게 되는 곳은 즐거운 파티나 좋은 일을 기리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어 가면서, 생일잔치나 사회적 모임의 장소 못지않게 자주 가게 되는 곳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곳은 바로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곳입니다.

더구나 이제 새로운 탄생만큼이나 떠나가는 사람이 주변에 많아지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인지,

어쩔 수 없이 반드시 가보아야 할 때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갑자기 사고로 죽음을 맞게 된 사람을 보면서, 응급실에서 이미 호흡이 멎은, 바로 잠시 전까지도 함께 웃고 이야기를 나누던 생생한 기억이 나에게서 채 가시지도 않은, 한 생명이 누워있는 모습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처음엔 그 사람에게 대한 어떤 연민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그녀)가 두렵지도 않았습니다. 아직 마음에서 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뜩 그의 영혼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갑자기 떠나게 된 그에게 한없는 연민이 생겨났습니다.

그는 삶 속에서도 스스로, 늘 불행하다고 여기던 사람이었기에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자주 만나던 사이가 아니어서 평소에 좀 더 그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한 것이 회한으로 밀려오자 그러한 사실이 더욱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깊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염을 하던 날,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친지와 가족들이 슬픔으로 목 놓아 울어대는 모습이 하나의 피사체처럼 나의 뇌 속에 상이 맺히듯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나 역시 슬프게 울고는 있었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이 아니라 관망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한, 하나하나의 장면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는 강하게 마음을 억누르는 슬픔의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슬프다고 여겨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슬퍼하면서 자아낸 분위기에서 감돌게 된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이, 그곳에 있는 모든 이를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슬픔 자체 때문이 아니라 슬픔의 기운에 의한 짓눌림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기운 속에 오래도록 머물게 된다면 그들도 모두 생명의 빛을 잃고 질식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습니다. 평소에 그녀는 항상 우울해했고 슬픔이나 외로움 또는 부정적인 생각들에 젖어 있었으며, 언제나 입버릇처럼 죽고 싶다고 말하곤 했는데, 나는 그녀의 그러한 생각들이 갑작스러운 사고를 불러일으켰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녀를 마지막 보던 날, 그녀가 그날따라 더욱 어두워 보였었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어떤 예감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온몸에 소름이 돋기도 했습니다. 그녀에게서 느꼈던 어둡고 탁한 그 느낌이 장례식장에서도 똑같이 느껴졌기에 잠시 두렵고, 불안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나는 그 사람이 누워 있는 자리에 내가 누워 있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애절한 울음소리를 느꼈습니다. 내가 먼저 떠나고 나면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들이 누구일까, 나 때문에 가슴 아파할 사람들이 있을까, 과연 나는 다른 삶들이 애석하게 여길 만큼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하고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이번엔 그 자리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누워있는 것이 상상되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억제할 수 없을 만큼 커지는 슬픔에 더욱 감정이 격해졌습니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은 상상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한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무덤덤하게 여기던 사람들이었는데 그 순간엔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도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내가 한 때, 미워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그곳에 누워있는 것이 그려졌습니다. 그러면서 죽음 앞에서는 모든 감정이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죽어버리면 그들을 미워한 나 자신이 더욱 후회스러워질 것만 같았습니다. 바로 직전까지도 밉게 느껴지던 사람조차 더 이상 미워하고 싶지 않아 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생각들은 내가 죽음이라는 것을 완전한 단절이라고만 여기는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지점, 보이는 곳과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나누는 경계선, 존재와 사라짐의 모호한 중심을 죽음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는다는 것이 슬프기만 했고 두렵고 무서운 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확연한 인식이 되었기 때문인지 육체의 사라짐에 대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영원한 안식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말대로 우리의 영혼이 이승에서 소모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잠시 하늘로 혹은 우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 어느 한 구석에서는 작은 설렘마저 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나는, 모든 준비를 하고 평화롭게 미소 띤 얼굴로 기쁘게 돌아갈 수 있기를 꿈꾸기로 마음먹어 봅니다.


예전에 누군가로부터, 어떤 이가 해골을 머리맡에 두고 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사이코(psycho)적인 발상이라 여겨지며 혐오감마저 일어났지만, 죽음을 항상 인식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정화해서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기 위해 조금 강한 자극요법을 쓴 것이라는 해명의 말을 듣고는, 그의 삶에 대한 자세만큼은 동조를 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의 모습은 죽음을 늘 갈망하며 현재 처해있는 삶을 비관하는 염세주의자와는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삶에 대한 긍정적인 애착이 있음으로 해서 가끔은 죽음을 인식하며, 잠시의 매듭에 불과한 삶의 마침표를 잘 찍으려는 의미 있는 노력으로 내게 비쳤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삶의 매듭을 지을 때, 자신의 삶을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게 여길 수 있도록 멋지고 아름답게 가꾸어 놓은 사람이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산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죽음에 대해 초월하여 아무런 두려움도 없게 된다면,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두려움 없는 마음으로 이 세상의 어려움을 모두 헤쳐 나간다면 극복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스스로가 불행하게 여겨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삶의 완성을 이루어 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죽음과 만날 수밖에 없지만 이미 삶 속에서 해탈을 이룬다면, 삶이나 죽음이나 결국은 종이 한 장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도 삶의 연장선상에 둘 수 있으며, 죽음이 결코 두렵지만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기보다, 의롭지 못하게 죽게 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나약함을 지닌 인간인 동시에 또한 그것을 극복할 수도 있는 강한 정신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정화해 가다 보면 죽음 앞에 떳떳한 자신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은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나는 그 말이 단지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가는 덧없는 삶에 대한 회의적인 의미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저 막다른 벽을 향해 허망한 달리기를 할 것이 아니라, 더 큰 세계를 꿈꾸며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육체적 소멸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동안 삶을 통해 갈고 다듬어진 영혼이 드디어 자유로워져서 그때부터는 영과 혼의 삶이 펼쳐지며 영혼이 진정으로 갈망하던 대로 자유롭게 보다 큰 우주를 떠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곳이 천국이라고 해도 좋고, 다음의 생을 준비하며 휴식하게 될 극락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누군가를 먼저 보내게 되었다고 해도 그리 슬퍼할 일만은 아닙니다. 육체라는 갑갑하고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무한히 넓고 큰 자유의 세상으로 가게 된 그를 오히려 축복해 주고, 언젠가는 나도 함께 가서 반갑게 다시 만날 수 있음을 희망하면 웃으면서 그를 보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살아 있으되 죽은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죽어서도 진정 밝게 사는 것이 차라리 더 낫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죽어야만 갈 수 있다고 믿었던 천국의 삶을 현세의 삶 속에서부터 먼저 살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아도 진정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이기심과 욕심, 그리고 미움과 자만심을 죽이는 삶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하루하루 더 젊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죽임과 동시에, 내가 살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살면서 마음에 맺힌 것이 없는 사람의 영혼은 죽어서도 맑고 밝은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우주의 맑은 기운과 합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죽기를 바랍시다.

단, 아름답게 죽을 수 있기를 바랍시다.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도록 영혼을 가꾸고 의식을 성장시키며, 죽음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도록 보다 멋진 삶을 살아냅시다.

윤동주 시인이 한 유명한 말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랍시다.


그런 마음이 충만해지면 죽어가는 다른 사람에게도 위로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주는 사람이 어느 분의 회갑잔치에서 놀아드리는 사람보다 값진 일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잔치야 누구라도 즐겁게 참석해 줄 수 있지만,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두려움이 없이 평화롭게 그리고 외롭지 않게 돌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려면,

인간에 대한 무한하고 절대적인 사랑과, 측은지심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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