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생의 글쓰기
로스쿨 시절, 나는 매일 글을 썼다. 사실, 주변에서는 학교 공부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한데, 어떻게 매일 글을 쓰느냐고 묻기도 했다. 아내는 글 쓸 시간에 공부를 조금이라도 더 해야하지 않겠냐고 가끔 불안해하며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 글쓰기는 오히려 로스쿨 시절을 견디게 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로스쿨 1학년 때는 아이가 태어났다. 당시 아내가 휴직 중이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이라도 생활비를 벌기 위한 일들도 했다. 칼럼을 기고하여 원고료를 벌거나, 가끔이라도 강연을 다니면서 강연료로 생활비와 학비에 충당하고자 했다. 당시 나는 가끔 ‘다른 것 안 하고 공부만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공부만 할 수 있는 주변 동기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그 ‘다른 것’에 글쓰기는 들어가지 않았다. 글쓰기는 오히려 하늘이 무너져도 계속하고 싶은 일에 가까웠다. 나아가 글쓰기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결혼 생활도, 육아도, 돈벌이도, 공부도 모두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매일의 압박감과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글을 썼다. 내 마음의 중심을 잠시라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때론 나의 마음을 껴안고 올곧게 보기 위해 매일 글을 썼다.
주위를 둘러보면, 함께 공부하던 동기들도 저마다 마음을 견디는 방법들을 갖고자 했다. 누군가는 주말마다 격한 운동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누군가는 매주 교회를 찾아가며 불안을 잠재웠다. 누군가는 매일 시간을 정해두고 열심히 게임을 하기도 했다. 나는 글을 썼다. 그렇게 쓴 글들은 SNS에 올리기도 했다. 글이 매일 쌓이자 책이 되기도 했다. 출판사에서 연락이 와서, 내가 쓴 글들을 묶어 책으로 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로스쿨 시절에 쓴 글들만 서너 권의 책이 되었다. 나는 로스쿨 다니며 ‘책’까지 낸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로스쿨에 가기 전부터 작가로 살고 있었기에 내게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로스쿨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글쓰기가 중단되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로스쿨은 삶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로스쿨에 들어가든 아니든 삶은 이어진다. 내게는 글쓰기도 삶이었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운동이나 기도처럼, 나의 글쓰기도 이어졌을 뿐이었다.
변호사의 글쓰기
변호사시험 거의 사흘 전까지도 이어졌던 나의 글쓰기는 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첫 직장으로 법무부를 다닐 때도, 두 번째 직장으로 로펌에 다닐 때도 계속 글을 썼다. 때로는 출퇴근길의 지하철 안에서 블루투스 키보드 하나만 들고 글을 쓰기도 했고, 때로는 직장의 점심시간에 혼자 카페에 가서 글을 쓰기도 했다. 어느 때는, 별을 보며 퇴근할 때도 있었지만, 집에 돌아와 늦은 밤 홀로 글을 썼다.
주변 사람들이나 인터뷰하는 기자들로부터 질문도 많이 들었다. 이를테면, 변호사의 글쓰기와 작가의 글쓰기가 충돌할 때는 없느냐는 것이었다. 변호사 일이 만만치 않게 바쁘고 힘들텐데 어떻게 글 쓸 에너지가 남아있느냐는 질문도 많았다. 그러나 나에게 그런 것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게는 거의 20년간 이어져 온 ‘나의 글쓰기 흐름’이 있었고, 이것은 너무 확고부동했던 나머지, 직업이나 소속, 주변 환경이 바뀐 것 같은 일은 거의 문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변호사 일이 글쓰기에 새로운 영감을 주기도 했다. 변호사란 세상에서 가장 절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직업이다. 작가로서만 살았다면 듣지 못했을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인생이나 세상에 대해서도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이별을 했거나, 결혼을 했거나, 아이가 태어났거나 하는 등 삶에서 일어난 여러 일들 중 하나의 일이었을 뿐, 내 삶의 모든 것을 바꿀 만한 일은 아니었다.
삶에서 흔히 가족이라든지, 직업이라든지, 다른 소속이나 주거지처럼 ‘중요하다고’ 이야기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삶은 그런 ‘중요한 것들’이 흘러가는 ‘외적’인 차원과, 그와 별개로 흘러가는 ‘내적’인 차원이 있는 듯하다. 내게는 그 많은 ‘외적인’ 사건들을 주워 담아 넣는 글쓰기라는 주머니 창고 같은 게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주머니 창고가 있다는 사실이 때론 아주 큰 위안이 된다.
10년, 20년이 지나서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는 도무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때가 되어서도 여전히 글을 쓰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어쩐지 삶을 살아낼 용기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삶에 아무리 복잡한 위기나 일들이 도래하더라도, 계속 글을 써나간다면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있을 거라 믿게 된다.
어려운 시절에 대처하는 방법
로스쿨 시절은 공부도 공부였지만, 내게는 여러 일들이 겹치면서 삶에서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다. 그 시절을 거치면서, 나는 삶에서 아마 가장 중요한 게 ‘인내심’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삶의 여러 부담들을 짊어지면서, 섣불리 도망가고자 하는 욕망을 끝없이 잠재우며, 시간이 흐를 때까지 버티고 이겨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관건은 그 인내심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인내심도 타고난 것이니, ‘인내심 수저’가 따로 정해져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인내심 그 자체에 너무 몰두하기 보다는, 인내할 수 있는 방법 자체를 찾는 게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글을 쓰기도 했다.
때로는 오늘의 소중함에 대해 썼다. 어린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시절은 그 자체로 너무 소중한 것이어서, 공부 틈틈이 가족들과 함께한 시간은 빼놓지 않고 기록해두려 했다. 때로는 공부하며 버텨야 했던 답답한 현실을 잊고 싶었다. 그러면 나의 현실과 전혀 관련 없는 글을 쓰기도 했다. 때로는 나의 상황도, 마음도 너무 복잡하여 나 자신을 직시해야 했다. 그럴 때는 나 자신의 마음과 현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 쓰려고 했다.
무엇이 되었든 그 모든 글쓰기는 ‘버티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 누구든 버티기 위해서 각자의 방법이 필요하다. 초인적인 인내심이 있어서, 마음 이상의 아무런 ‘방법’도 딱히 필요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와 같은 범인이라면, 대개 인내를 위한 방법도 필요할 것이다. 그런 방법 중 안 좋은 건 술이나 담배 같은 것일텐데, 그보다 더 건전한 각자의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심리학자 애덤 그렌트의 <히든 포텐셜>이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지루한 일을 무조건 견디기 보다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즐기는 방법’을 찾아낼 경우, 견디기 수월해지고 성취도 매우 높아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성취가 뛰어난 사람들은 무작정 훈련이나 연습, 일 등을 견디는 능력이 뛰어날 것 같지만, 실은 그것들을 어떻게 즐길지 찾아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수험생활도,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게 견뎌야 한다고 하는 일들이지만, 그 나름의 견디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우리의 성취도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어려운 시절을 글로 승화시켜내는 즐거움을 찾는다. 누군가는 동기들이나 동료들과 수다 떨며 그 시절을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느낀다. 당신이 지금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면, 초인이 되려하기 보다는, 그 시절을 조금이라도 견딜 만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보길 바란다. 다들 그렇게 애써 견뎌내고, 다음 시절로 간다.
* 로스쿨타임즈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