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부버의 나와 너
어렸을 적 주택에 살았습니다. 솜씨 좋은 목수님께서 직접 지은 나무집이었는데, 제가 7살 되던 해에 그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됐습니다. 방이 3개였고, 마당이 있는 집이었습니다. 집 앞에는 넓은 옥수수 밭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비 오는 날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비 오는 날 옥수수가 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눈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소리가 들립니다.
"쩍 쩍"
비가 오는 날이면,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립니다.
그 옥수수 밭 한편에 우리 가족이 키우는 동물들이 있었습니다. 닭과 토끼 그리고 송아지 몇 마리를 키웠습니다. 닭과 토끼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저와 동생의 일이었는데, 만만치가 않은 일이었습니다. 매일매일 똑같은 시간에 집에 와야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놀이에 빠져 있는 아이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결국 토끼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개도 한 마리 키웠는데, 당시 개는 풀어놓고 키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루는 엄마 심부름으로 두부를 사 와야 했습니다. 제가 가게로 내려가니 우리 집 개도 저를 졸졸 쫓아왔습니다. 우리 동네 가게는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었는데, 산업 도로 앞에 있었습니다. 저는 가게에 들어가 두부를 사서 돈을 내고 가게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 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개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개는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찾은 끝에 산업도로 변 개울 밑에 떨어진 개를 발견했습니다. 차에 치었는지, 다리를 휘저으면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한 걸음에 다리 밑으로 내려가서 개를 안았습니다. 그리고 너무 놀라 울면서 집으로 왔는데,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집에 와보니 엄마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개울에서 엄마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엄마 개가 다쳤어!"
하지만 엄마는 너무 태연하게 "응 그래? 어디서?"라고만 말할 뿐 하던 일을 계속하며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더 크게 소리 지르며 "개가 다쳤다고!"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기억입니다.
며칠 후 아빠와 친구들이 개울에서 무언가를 먹고 있었습니다. 가서 보니, 개를 잡아서 먹고 있었는데, 우리 개를 먹은 건지 다른 개를 먹은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이후로 우리 개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아마 어렸을 적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는 분들이라면 "이 무슨 야만적인 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하지만 제 기억에 이 당시 상황은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그저 하나의 '일상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논쟁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과거 우리가 개를 잡아먹던 일들은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행위인가?
서양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를 먹는 것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개를 먹는 것이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굳이 권장할 만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양 사회는 우리보다 더욱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어떤지는 모르지만, 다양성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문화 인류학자들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문화 상대주의'를 주장했습니다. 문화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문화적 맥락'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개를 때리는 행위라 하더라도 그 행위의 목적이 '폭력 그 자체'인가 아니면 '생존을 위한 수단'인가에 따라 다른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어떠한 행위를 하는 내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그 행위가 폭력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점들은 우리 사회 법에도 적용되어 동일한 살인이라도 '정당방위'인가 아닌가를 구별하기도 합니다.
동물에게 권리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 존재의 문제인가?
철학자로서 최초로 Animal rights을 주장한 피터싱어는 '지능'이 아닌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중심으로 '권리'라는 개념을 생각했습니다. 동물은 고통을 자각하니 권리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분명 동물은 고통을 느끼는 듯합니다. 하지만, 고통의 문제를 중심으로 '권리'를 말한다면, 생물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니 '고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꼬리에 무는 질문의 끝에 도달하는 결론은 '고통'이란 감정은 인간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동물의 고통스러워하는 '반응'을 인간은 단순히 통증으로 느끼는 것을 넘어서서 고통의 문제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존재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틴 부버는 타자를 대하는 방식은 단순히 타자 자체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근원 어는 존재에서 나온다. '너'라고 말할 때에는 복합어 '나-너'의 '나'도 함께 말한 것이 된다. '그것'이라고 말할 때에는 복합어 '나-그것'의 '나'도 함께 말한 것이 된다."
어떤 대상을 '너'라는 생명으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그것'이라는 생명이 없는 사물로 부르냐의 문제는 또한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동시에 말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개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단순히 개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개에게 폭력을 가하는 내가 '인간다움의 길에서 벗어나 게 된다'는 것이 진정한 문제입니다.
마틴 부버의 생각을 적용하면, 단순히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되는 근거가 마련됩니다. 함부로 꽃을 꺾는 행위의 문제는 '꽃'이 고통을 느끼는 문제를 넘어서서 이유 없는 훼손의 행위가 '인간다움의 길'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더 큰 사태는 인간이 인간다움의 길을 벗어나는 문제이며, 상황에 따라 동물과 식물의 생명을 훼손하게 되더라도, 그에 대한 총체적인 예의, 존중, 감사로서 다가가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늑대와 춤을'을 한 장면은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서부 평야에 사는 인디언들이 '버펄로 사냥'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버펄로를 죽입니다. 미군들도 버펄로를 죽입니다. 인디언들은 버펄로 죽임에 있어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수만큼만 사냥합니다. 하지만 미군들은 버펄로 가죽을 팔아 돈을 벌 생각으로 그렇게 합니다. 동일한 '살해' 행위이지만, 그 뜻이 다릅니다. 인디언은 버펄로를 '나-너'의 관계 안에서 대하지만, 미군들은 '나-그것'의 관계로 대합니다.
버펄로는 동일하게 고통을 느끼고, 죽음을 당했지만, 그 대상에게 접근하는 인간의 두 길이 있음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