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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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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peBM Aug 19. 2023

사소한 이유 (3)


[3]

경수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정석은 출근을 한 이후였다. 경수는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어제 조립한 책상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내가 여기를 들어오긴 했구나. 그럼 이제 무얼 해야 하나. 본인 집의 본인 방이었을 땐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았다. 하지만 남의 집이었기에 홀로 남아있는 것 자체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경수도 집을 나섰다.

 

경수가 정석의 집을 떠나 도착한 곳은 소극장이었다. 그곳에선 연극 준비가 한창이었다. 배우들의 대사 억양, 몸짓으로 미루어보아 어린이극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였다. 경수는 잠시 구석에 앉아 연극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극단은 경수가 대학시절 잠시 몸담았던 곳이었다. 단순 동아리 활동을 넘어, 실제 직업이란 세계를 마주했을 때의 설렘을 경수는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극단에 함께 있었던 윤재가 경수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윤재는 지금은 극단의 연출을 담당하고 있었다.

“잠깐 쉬죠.” 윤재는 연습을 중단하고는 경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야,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그것도 이른 시간에”

“그냥 할 일도 없고, 간만에 생각나서 와봤지” 경수는 윤재가 편한 듯, 본인의 현재 처지를 비관한다거나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없었다.

“그래, 요즘은 어때?”

“뭐 똑같지. 오디션 있으면 오디션 보러 다니고. 프로필 돌려보고. 지금 형이 하는 거엔 빈자리 없어?” 경수는 괜히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왜? 하게? 할 거면 없는 자리도 만들어 줄 수 있어” 

“됐어. 괜히 방해만 되지”

“네 재능은 이런 데 쓰기 아까워. 다 애들인데 쟤네 사이에서 뭘 하려고.”

“재능은 무슨. 그런 게 있었으면 지금 이러고 있겠어” 경수는 괜히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냥 운이 없는 것뿐이야”

“형 그 영화 봤어? 대훈이 나온 거”

“어. 보긴 봤지” 윤재는 경수가 무슨 말을 할지 불안했다. 비슷한 위치에서 출발했지만 그 격차가 급격히 벌어진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연기 잘하더라. 확실히 잘해. 난 다른 일이나 알아볼까봐”

“야 걔는 걔한테 맡는 배역을 지금 만난 거뿐이야. 너도 그런 거 만나면 되는 거야”

“그걸 언제까지나 기다릴 순 없는 거잖아. 안 올지도 모르는 거고. 재능이 있었으면 그 기회자체를 내가 만들었겠지만, 그 정도 재능은 아닌 거 같어.”

윤재는 잠시 대답하기를 꺼렸다. 경수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진짜 그만 두려고?”

“생각 좀 더 해봐야겠지만, 아마 그럴 거 같은데?”

윤재는 아쉬웠다. 분명 그의 눈에 경수는 연기 자체에 재능이 없진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경수를 붙잡고 싶었다.

“야 그럼, 일단 오디션 한번만 더 해봐. 그 너 필상 선배 알지? 지금 그 선배가 조감독으로 있는 작품에서 배우 하나 더 뽑는다고 나한테도 연락 왔었거든. 그게 너한테 딱이다.”

“딱은 무슨, 괜히 또 바람 넣지마. 무슨 역할인지도 모를 거 아녀” 그렇게 말하면서도 경수는 은근 기분이 좋았다.

“그거까지 해보고 결정해도 안 늦잖어. 오디션도 당장 이번 주 금요일이니까 그렇게 멀지도 않고”

경수는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경수 본인도 알고 있었다. 본인이 안 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 대신 형이 좀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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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은 게임사의 신규 출시 게임 홍보 기획안을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있었다. 해당 게임사는 오랜 기간 정석이 맡아온 고객사 중 한 곳이었다. 정석은 그 어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여 해당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회사에서의 마지막 프로젝트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정석은 피피티 자료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한 뒤, 고객사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수정안 확인을 요청했다. 전화를 마치자 마침 정석에게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ㅇㅇ/홍보팀장 경력직 채용 면접 안내’

‘일시: 금주 금요일 14시’

‘장소: ....’

정석이 면접 안내 문자를 읽어나가고 있을 때, 같은 팀 오현진 매니저가 다가왔다.

“팀장님, 신규 출시 게임 보도자료 작성한 거 확인해주시겠어요?”

정석은 봐선 안 될 것을 보고 있었던 듯이 급히 휴대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어? 어 보도자료. 확인해보고 알려줄게요.”

정석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자리로 되돌아가는 오 매니저를 붙잡았다.

“저 오 매니저? 이번 게임사 맡은 지 얼마나 됐죠?”

“저요? 저 한 4개월? 정도 됐을 걸요?”

“4개월... 그럼 어느 정도는 대강 다 파악 됐겠네요?”

“팀장님에 비하면 택도 없죠. 근데 그건 왜...”

“아뇨. 그냥 이번 기획안 보니까 좋아서요”

“감사합니다”

정석은 오 매니저가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서야 면접 안내 문자를 마저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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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가 정석의 집으로 돌아온 것은 늦은 오후였다. 경수가 돌아온 지 얼마지 않아 현관문의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석이 퇴근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경수는 정석이 벌써 돌아올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정석이 아니었다. 한 중년의 여성이 서있었다. 경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의 등장에 당황했다. 

 

당황한 것은 문을 열고 들어온 미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아들의 집에 누가 온 것을 본적도 없을뿐더러 누가 와있을 공간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구시죠?” 미현이 먼저 물었다.

“저는 정석이형 동.. 아 아니 아는 동생 이경수라고 합니다.”

미현은 동생이라는 말에 약간의 감정 변화를 보였다. 아직은 정민을 떠나보내지 못한 미현이었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떠나보내지 못할 것이다. 미현은 태연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누가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전 정석이 엄마에요”

“안녕하세요 어머니!” 경수의 대답은 필요 이상으로 공손하고 깍듯했다. 정석의 엄마 미현보다는 정민의 엄마 미현으로 존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정민이 친구였다는 얘기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미현은 들고 있던 찬거리들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아직 정석이 올 시간은 멀었는데, 어떻게 들어왔어요?”

“아... 그게... 요 며칠 신세 좀 지기로 해서요...”

그제서야 미현은 거실에 내놓아져 있는 정석의 짐들을 확인했다. 분명 저번 주까지만 하더라도 방안에 쌓여있던 짐들이었다.

“방까지 내주고... 혹시 남자 친구... 그런 거예요?” 미현은 괜시리 농담을 건네보았다.

“네? 아뇨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일주일 정도만 신세 좀 지기로 해서요”

“농담이에요. 그나저나 놀랍네 정석이가 챙기는 동생도 있고”

그 말에 잠시 침묵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정석과 정민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은 미현도 알았고 경수도 알고 있었다. 미현의 말에 둘은 자연스레 정민을 떠올렸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미현이었다.

“그럼 오늘은 계속 집에 있는 거에요?”

“네? 네”

“잘됐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정석이 걔는 통 뭐 먹고 싶다는 얘기를 안 해서”

“저는 뭐든 괜찮습니다”

“뭐든 괜찮기는, 가만있어 봐요” 미현은 냉장고를 열어보았지만 식재료라 부를 수 있을만한 것들이 마땅치 않음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얘는 정말... 아무리 혼자 산다지만... 집에 있어요. 잠깐 가서 장 좀 봐오게”

“정말 괜찮은데... 같이 가서 도와드릴까요?”

“아냐 집에 있어요. 괜히 손님 고생시키는 거 아니야. 그리고 누가 장 볼 때 옆에 있으면 불편해” 사실 미현 입장에선 경수를 대동해도 상관없었다. 정석의 아는 동생이라 말하는 경수에게서 정민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미현은 경수의 도움을 거절하고 홀로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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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집에 손님 와 있는 거 왜 얘기 안했어” 미현은 한 손으로는 채소를 이것저것 비교해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정석과 통화를 했다.

“아 맞다. 얘기 한다는 걸 깜빡했네. 한 일주일 있을 거에요” 정석은 왠지 모를 찝찝함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깨달은 반응이었다. 정석은 퇴근길에 운전을 하며 미현과 자동차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이어갔다.

“누구야? 네 아는 동생이라던데, 너한테 아는 동생도 있었어?”

“아... 그게”

“뭐야. 진짜 남자친구야?”

“어? 뭔 소리 하는 거야. 아들은 여자 좋아합니다”

“그럼 누군데?”

“...정민이 친구야”

미현이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을 눈치 챈 정석은 서둘러 대화 주제를 전환했다.

“엄마 어딘데 이렇게 시끄러워? 밖이야?”

“어? 어. 지금 마트 와 있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난 뭐 딱히? 왜 오늘은 우리 집에서 먹게? 아부지는?”

“손님도 와 있는데 한 끼는 멕여야지. 니 아버지 하루쯤은 혼자 드셔도 돼”

“오히려 좋아할 수도 있어”

“뭐?”

“아냐. 태우러 가?”

“됐어. 바로 코앞인데 뭐”

“나도 거의 다 왔어. 그럼 집에서 봅시다”

“그래”

전화를 끊은 미현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왜 본인이 정민의 친구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왜 정석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을까. 정민과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일까. 경수에 대한 궁금증인지, 정민에 대한 궁금증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미현은 다시 한 번 감정을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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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현과 정석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다. 친밀한 모자 사이였고 무슨 말이든 다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사이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민의 친구인 경수에 대해 무슨 말을, 누가 먼저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정민이 친구라고?”

“어”

“그래”

“밥 먹으면서 얘기해줄게. 좀 설명하기 쉬운 일은 아니어서. 그래서 아마 먼저 얘기 못 꺼냈을 거야”

“정민이 친구면, 더 맛있게 해줘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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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으며 경수는 아까와 달리, 본인이 정민과 어떤 약속을 했는지, 그래서 정석의 집에서 일주일간 살게 된 경위를 털어놨다. 경수가 말하는 동안 미현과 정석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하지만 아직, 경수가 정민과 그 약속을 왜 했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직 준비한다는 건 어떻게 됐어?” 미현이 정석의 근황을 물었다.

“그거 금요일에 면접보기로 했어요. 아마 큰 문제없으면 될 거 같아. 얘기도 미리 어느 정도 돼 있는 거라” 정석은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금요일?” 경수는 본인의 오디션 날짜에 정석도 면접을 본다는 사실에 반사적으로 물었다.

“왜 그 날 뭐 있어?”

“아... 나도 오디션 보기로 해서...”

“오디션?” 미현은 무슨 소리인가 싶다.

“경수가 배우더라고” 머쓱해하는 듯한 경수를 정석이 대신 말했다.

“배우는 무슨... 지망생이에요. 이것도 언제까지일진 모르겠지만”

“오오 멋지다. 그 말 듣고 보니 더 잘 생겨보이네요. 싸인이라도 미리 받아놔야 하나” 

“어디로 이직하는데?” 본인에게 쏠리는 관심을 돌리기 위해 경수가 물었다.

“뭐랬지? 포털회사? 그 큰 회사에 팀장직 제의받고 들어가는 거에요” 미현이 자랑하듯 말한다. 경수는 정석이 새삼 대단하다 느꼈다.

“우와... 형 대단한 사람이었네...”

“대단은 무슨”

미현은 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가까워 보이는 둘의 모습에 흐뭇하기도 하면서도 정민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움의 감정이 함께 몰려오는 듯 했다.

“그런데... 왜 정석이를 찾아간 거에요? 일주일간 가족하기로 한 거였으면 나나 정민이 아빠를 찾아갔어도 됐는데... 뭐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미현이 물었다.

“아 그게...”

“그러게. 생각해보니 그렇네. 나한테 연락한 이유가 있어?” 정석도 그 이유에 대해 궁금증을 느꼈다.

경수는 당혹스러움을 느꼈지만 언젠간 말해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었기에 조심스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민이 정석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본인이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러다가 서로 본인의 가족이 더 못났다는 둥, 네가 더 낫다는 등... 그러다 술마시면서 했던 장난스런 약속, 정민의 죽음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 약속을 왠지 지켜야 할 것만 같았던 감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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