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에게 이승철은 '노래 잘 하는 가수'였다.
당장 초등학생 때 친구 형이 이승철 흉내를 잘 내는 걸 보며 '멋있다'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승철의 목소리는 가녀리면서 설득력이 있었다.
애절했고, 그 애절함을 듣는 이가 공감할 수 있도록 불렀다.
이승철 4집은 그의 목소리가 가진 또 하나 특징을 사운드에서도 느낀 첫 번째 경험이었다.
그 특징이란 '깨끗함'이다. 소리가 깨끗했다는 뜻이다.
이 작품에선 노래에도 사운드에도 군더더기란 없었다. 모든 게 강박적으로 말끔했다.
이유는 조용필, 신해철, 이승환이 똑같이 집착했던 그것, '영미권 사운드'의 이식 덕분이었다.
이승철은 이 야심작을 위해 미국으로 날아갔고, 그곳에서 편곡하고 녹음했다.
속지에 적어둔 스튜디오들을 추적해보니 그가 머문 곳은 뉴욕이었던 것 같다.
이승철 본인이 작업 후기 끝에 "매디슨Madison에서"라고 적시해놓은 걸 보면 그는 위스콘신 주에도 얼마간 머문 것으로 보인다.
일단 세션 뮤지션들 이름에 장난이 없다.
타이틀 곡 <색깔 속의 비밀>에 비밀 같은 리듬을 썰어넣은 오마 하킴,
이 앨범을 처음 들었던 1994년부터 지금까지 즐겨 듣는 <웃는 듯 울어버린 나>에 칼날 같은 비트를 그은 베테랑 드러머 스티브 페론,
지난 달2025년 10월 19일 세상을 떠난 전설의 베이시스트 앤서니 잭슨,
펑키 트랙 <독신일기>에 슬랩 베이스 샘플을 제공한 마커스 밀러,
<색깔 속의 비밀>과 <누구나 어른이 되서>를 주도한 재즈 기타리스트 척 로엡,크레디트엔 없지만 정황 상 <웃는 듯 울어버린 나>와 <소나기> 기타도 그의 솜씨로 보인다.
정원영이 작곡한 아카펠라 넘버 <겨울 그림>과 채정은이 노랫말을 쓴 <작은평화>에서 조용히 맹활약한 피아니스트 앤디 에즈린,
그리고 한국 블랙뮤직 계보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이름 김홍순<착각>과 <흑백논리>의 뉴 잭 스윙 그루브가 그에게서 나왔다까지.
녹음 장소나 함께 한 사람들 면면을 봤을 때 음악이 세련되지 않으면, 거기에 품격이 없으면 이상할 일이었다.
이승철 나이 겨우 28살이던 때, 육중한 브라스와 스트링이 쏟아져내리던 앨범에선 '어른' 냄새가 물씬 났다.
어렸을 땐 부활의 리메이크 <소나기>가 귀에 들어오더니,
나이 들어선 <누구나 어른이 되서>에 고개를 끄덕인다.
음표 하나, 가사 한 자마다 음악으로 성숙해지고 싶었던 그의 야심, 바람이 절절하다.
이승철 4집은 이승철의 클래식이다.
버릴 곡이 없다.
시대와 장르를 허문 '한국 ~대 명반' 같은 것이 언제 또 추려질 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앨범이 그 리스트 어느 한 자리를 꼭 차지해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