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팝씬의 노른자
‘All I really want’의 하모니카 전주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앨범이다. 내가 열여덟 살일 때 스물 하나였던 앨라니스는 이미 플래티넘 데뷔작을 포함해 정규작 두 장을 내놓은, 고국인 캐나다에선 나름 스타 반열에 오른 상태. 그 상태에서 이 앨범 [Jagged Little Pill]로 세계적인 프로듀서가 된 글렌 발라드와 호흡을 맞추게 되었고, 결과물은 1년 여동안 미국에서만 1,300만 장 이상이 팔려나가며 90년대 팝록씬을 초토화시켰다.
1996년. 앨라니스는 버블검 팝을 버리고 포스트 그런지에 입 맞춘 이 괴물 같은 앨범으로 그해 그래미 어워즈 아홉 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시켜 ‘올해의 앨범’상을 포함 무려 다섯 개 상을 휩쓸었다. 약관에 이룬 이 놀라운 기록은 컨트리 팝 뮤지션 테일러 스위프트가 [Fearless]로 2010년 그래미 ‘올해의 앨범’을 타기 전 14년 동안 깨지지 않은 최연소 수상 기록이었다. 이처럼 90년대 중반, 앨라니스 모리셋은 잘 나가는 가수를 넘어 그 자체 하나의 '현상'이었다.
앨라니스만의 앙칼진 보컬 스타일을 들려준 첫 곡을 지나면 이 앨범의 효자곡 ‘You oughta know’가 흐른다. 자조적인 ‘You learn’과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곡으로, 걸쭉한 펑키 그루브는 앨리스 쿠퍼와 연이 있는 드러머 맷 로그(Matt Laug)와 제인스 애딕션의 데이브 나바로, 그리고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플리가 함께 뽑아낸 것이다. 90년대를 대표하는 팝송으로 손색이 없으며, 나 역시 '90년대' 하면 열 손가락 안에 꼽는 곡으로 20년이 지난 요즘도 짬을 내 듣는 싱글이다.
수록된 대부분 곡들에서 기타와 키보드, 프로그래밍을 담당한 글렌 발라드는 앨라니스와 공동 송라이터로서도 깊게 활약하며 이 앨범의 일등 공신으로 남았다. 한마디로 그와 [Jagged Little Pill]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으로 궤 지어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 명 기타리스트 마이클 랜도(‘Forgiven’)가 등장하고, ‘Right through you’를 비롯 여섯 곡에서 오르간을 연주한 벤몬트 텡크(Benmont Tench - 톰 페티 앤 더 하트 브레이커즈의 원년 멤버)가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작품은 <롤링스톤>의 표현대로 “캐럴 킹의 [Tapestry] 90년대 버전”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성향은 한국의 김윤아라는 싱어송라이터에게까지 영향을 주며 자우림이라는 밴드를 우리에게 선물했다. 앞선 이들과 따르는 이들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역사'란 이런 것이고, 역사는 또한 늘 그렇게 흘러왔다.
퍼지 기타와 흑백 뮤직비디오가 좋았던 ‘Hand in my pocket’, 일상의 아이러니를 일상의 이야기로 풀어낸 ‘Ironic’, 그리고 포근했던 ‘Head over feet’의 얼터너티브 록 사운드. 10대 때 접한 명반들은 많지만 전부가 처음 들었을 때 그 떨림, 감동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진 않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 텐데, 이 앨범은 신기하게도 들을 때마다 나를 ‘어렸던’ 그 시절로 데려간다. 그녀 목소리처럼 힘이 넘치고 그녀의 탄식처럼 고민에 휩싸였던 시절. 때문에 [Jagged Little Pill]이 내 방안에 울려 퍼지면 앨라니스는 언제나 젊디 젊은 스물한 살, 나는 그때 그 열여덟, 아직 세상을 알기엔 진지한 반올림이 필요했던 고등학생 남자 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