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커버를 철학으로 안내한 집단, 힙노시스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새 앨범을 개봉하는 건 종교적 경험이었고, 바늘이 LP의 소리골에 내려앉으려던 순간, 막 들어가려던 마법의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서 앨범 커버는 반드시 필요했다. - 피터 가브리엘
이제는 음반이 아닌 음원이어서 물리적 앨범 커버가 “마법의 세계를 그려내”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 그럼에도 앨범 커버는 여전히 중요하다. 처음 음악이 우리에게 올 때는 소리여도 우리가 처음 보게 되는 건 어쨌거나 그 음악을 상징하는 앨범 커버이기 때문이다. 과거 앨범 커버는 담긴 음악 외 구매자가 그 앨범을 살지 말지를 결정하는 또 다른 기준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핑크 플로이드나 헤비메탈의 큰아버지인 아이언 메이든의 경우,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 앨범 커버를 모으기 위해 작품들을 구매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 책은 힙노시스(Hypnosis)라는 디자인 집단이 1967년부터 84년까지 만들어낸 음반 커버 아트 즉, 로렐 에이트킨의 67년작 ‘Says Fire’에서 “CD가 도래해 LP를 끝장낸” 84년 베리 깁의 작품 ‘Now Voyager’까지 373장을 다루고 있다. 핑크 플로이드, 10cc, 레드 제플린, UFO, 폴 맥카트니의 윙스(Wings) 같은 단골들부터 버스 컨트롤(Birth Control), 스트롭스(Strawbs), 비밥 디럭스(Be-Bop Deluxe) 등 비교적 덜 알려진 당대의 존재들까지 대거 호출되었다. 저자는 오브리 “포” 파월로 힙노시스에서 사진을 찍던 사람이다. 그래서 이 책은 파월의 기억과 시선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대중이 잘 아는 스톰 소거슨의 말은 10cc의 ‘Deceptive Bends’ 커버를 예로 삼아 77년에 쓴 글 ‘음반 커버를 디자인하는 방법’에서만 만날 수 있다. 물론 그 시절 스톰의 작품들을 비롯 힙노시스 동료들과 함께 만든 명작들은 글과 별개로 책 구석구석에서 치열하게 소개된다.
힙노시스는 사람들이 음반 커버를 철학적으로 보게 만든 최초 집단이다. 맥락보다는 도발, 상식보다는 혁신을 즐겼던 그들의 초현실 세계는 살바도르 달리와 르네 마그리트, 프랜시스 베이컨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우주 헬멧을 쓴 나체 여인이 우유가 흩뿌려지는 모뉴먼트 밸리 위에서 부유하는 모습(스페이스의 ‘Deliverance’), 얼굴 없는 레코드사 간부가 사막 한가운데서 은빛 디스크를 건네는 장면(핑크 플로이드의 ‘Wish You Were Here’), 그리고 도축된 소고기들 사이에 산 사람을 물구나무 세워놓은 기괴한 설정(에드가 브로튼 밴드의 ‘Edgar Broughton Band’)이 그 예들이다. 당시는 포토샵과 고도의 컴퓨터그래픽이 미래 과학이었다.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사진기 조작과 필름 선택, 손으로 그리고 오리고 붙이는 것 외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아이디어 하나와 그 아이디어를 구현한 세팅만으로 힙노시스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해냈다.
80년대 이후 힙노시스는 그 자체 브랜드가 되었고 앨범 커버 디자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힙노시스가 만든 앨범 커버는 누가 봐도 힙노시스만이 만들 수 있는 커버였다. 그것은 사무엘 베이어(Samuel Bayer)가 만든 뮤직비디오, ECM의 음반 커버가 응당 그래야 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당위였다. 오디오슬레이브의 데뷔작, 뮤즈의 ‘Absolution’과 크랜베리스의 ‘Bury The Hatchet’ 등 스톰 소거슨의 후기 걸작들을 볼 수 없는 한계는 있지만, 힙노시스의 시작과 전성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몫을 다했다. 즐겁고 충격적인 이미지 여행이 될 것이다. 단, 음악은 잠시 꺼두셔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