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의 꽃갈피 시리즈는 서영은의 로맨틱(Romantic) 시리즈를 닮은 성공적인 가요 리메이크 브랜드다. 잘해야 본전, 못 하면 여지없이 박한 평가를 받는 이 작업을 아이유가 긴 호흡으로 계속해나가는 이유는 본인 음악의 아득한 레퍼런스를 고백하는 한편 창작자로서 휴식, 나아가 과거로의 여행을 위함이리라 생각한다. 그가 영리한 점은 그렇게 느긋한 감성을 안고 가면서도 쏜살같은 트렌드까지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앨범의 경우 각각 ‘미인’과 ‘Last Scene’에서 활약한 바밍타이거, 원슈타인의 섭외는 그래서 꽃갈피가 단순히 추억에만 갇혀 있는 기획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다.
빨간 운동화
강현민, 이재학의 그늘이 짙어 반(半) 러브홀릭스 앨범 같았던 박혜경 3집에서 아이유가 부를 만한 곡들은 많았다. ‘Feel Me’를 취해도 됐고 ‘동화’를 가져와도 됐다. 모두 강현민의 곡들이다. 아마 이재학이 쓴 ‘Rain’을 아이유가 불렀어도 노래는 완전히 색다른 우울을 우리 귀에 건넸을 테다. 그러나 아이유는 세 번째 꽃갈피의 첫 트랙을 위해 “기분을 반짝거리게 해주는 마법 가루” 같은 박혜경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그래서 고른 노래가 이재학과 박혜경이 함께 작곡하고 박혜경이 노랫말을 붙인 ‘빨간 운동화’다. 근래 싱어송라이터 윤마치는 박기영과 함께 부른 러브홀릭스의 ‘Loveholic’을 두고 마치 자기가 쓸 법한 노래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이유가 커버 한 ‘빨간 운동화’도 나에겐 그런 곡처럼 들렸다. 아이유가 만들어 자기 앨범에 실었을 법한 노래라는 얘기다. 그만큼 잘 어울리고, 노래는 가수와 격의 없이 공명한다. 단, 편곡에서 아이유 버전과 박혜경 버전은 닮은 듯 갈린다. 아이유가 “청량함과 재기발랄함”을 더해주었다고 평가한 이진아의 편곡은 원곡의 비스듬한 업비트를 바로 세운 한편, 버스(verse)는 정박으로 포장해 더 듣기 쉽게 만졌다. 이 과정에서 박혜경 버전의 모던 록 사운드는 따뜻한 재즈 팝 사운드로 수렴되는데, 특히 원곡의 일렉트릭 기타를 재지 한 피아노 솔로로 대치한 후반부 간주는 따로 인상 깊다. “빨간 운동화”로 끝나는 보컬 솔로 마무리는 박혜경과 아이유 버전이 같다.
Never Ending Story
꽃갈피 시리즈뿐 아니라 대부분 대중음악 리메이크의 목적은 ‘좋은 노래의 소개’일지 모른다. 김태원의 작곡가로서 감성, 이승철의 가수로서 표현력에 새삼 감탄하게 되는 부활의 이 곡도 마찬가지다. 산처럼 우뚝 선 명곡의 환기다. 구체적으론 “습관처럼 익숙해진 나머지 멜로디와 가사를 구태여 곱씹지 않게 되는 명곡”의 녹슬지 않는 생명력, 그것의 소환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변주한 뮤직비디오를 가진 이 트랙은 다른 편곡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듯 원곡과 같은 피아노 연주로 문을 연다. 그저 마지막 마디에 스트링을 덧대 원곡의 도입부와 차별화를 꾀하는 부분에서 아이유 버전의 개성은 지켜진다. 부활은 팀이고 아이유는 솔로여서일까. 편곡자 서동환은 첫 후렴구에서 밴드 사운드를 지우고 이내 다음 후렴구에선 원곡처럼 밴드 사운드를 넣는다. 이때 믹싱에서 밴드 악기들은 아이유의 노래를 위한 먼 배경에 머무는데, ‘Never Ending Story’는 부활의 노래이지만 꽃갈피는 어디까지나 아이유의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10월 4일
지난 5월 17일, 아이유가 ‘꽃갈피 셋’ 콘셉트 포토를 공개했을 때 나는 서태지 7집에서 한 곡이 선택됐음을 알았다. 못 대신 꽃갈피에 찔린 사람의 실루엣을 담은 ‘7th Issue’(서태지 7집 제목) 응용 이미지를 보며 나는 내심 ‘Heffy End’나 ‘Live Wire’ 정도의 파격적인 선곡을 기대했던 것 같다. 헤비한 절망으로 얼룩진 ‘로보트’도 나쁘진 않았을 터다. 하지만 아이유는 해당 작품에서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곡을 골랐다. ‘10월 4일’. 아이유는 과거 무선호출기 시절 ‘1004’라는 암호를 주고받던 사람들의 “아름다운 감성”을 언급하며 이 곡의 시대성을 확인했다. 그는 여기서도 편곡자 구름의 힘을 빌려 원곡과 다른 어레인징을 선보인다. 즉 힘찬 어쿠스틱 기타와 여린 보컬의 중첩 대신, 별가루 같은 건반 멜로디를 뿌리며 아이유 버전은 시작하는 것이다. 이어 푸석한 루프를 깐 뒤 그 위에 지은 비트 위에서 서태지의 ‘10월 4일’은 21년 전과 많이 다른 옷을 입고 새롭게 태어난다. 11년 전 ‘소격동’이 아이유와 서태지의 직접 협업이었다면 ‘10월 4일’은 두 사람의 간접 협업이다.
Last Scene
롤러코스터의 ‘Last Scene’은 댄스 플로어에 초대한 ‘바람이 분다’(이소라)였다. 편곡자들과 아이유는 그것을 고개 숙인 ‘시간 속의 향기’(강수지)로 데려간다. 하여 차분한 질주감을 주었던 원곡의 메인 비트는 화자의 부서진 마음처럼 토막이 났다. 인연의 마지막을 묘사하는 곡이므로 아이유의 목소리도 텅 비어있다. 그리고 무심하게 2절을 소화하고선 사라지는 원슈타인의 피처링은 이 회색의 감정을 더욱 고립시킨다. 11년 전 첫 번째 꽃갈피의 ‘너의 의미’, ‘쿵따리 샤바라’에서 했듯 이 곡에서도 조원선을 초대했다면 어땠을까. 원곡의 팬으로서 살짝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그래도 낯익은 기타 톤이 원작자인 이상순의 것이었다니, 그나마 반가웠다.
미인
각설이 타령에 영감을 얻어 한때 “3천 만의 주제가”로 불린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은 ‘꽃갈피 셋’에서 가장 멀리 간 곡이다. 두 번째 꽃갈피에서 리메이크 한 정미조의 ‘개여울’과 동시대이겠다. 처음 콘셉트 포토에서 신중현을 흉내 내며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있는 아이유를 보고 나는 이 곡이 원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역사에 남은 명 일렉트릭 기타 리프가 아이유 버전에서도 재현되리라 기대한 것이다. 뚜껑을 열어보니 내 생각은 아이유의 구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나인 인치 네일스의 ‘Closer’가 ‘미인’을 만난 느낌이었다. 시대의 힙스터 집단인 바밍타이거(Balming Tiger)가 함께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이유는 ‘10월 4일’의 소녀에 과거의 자신을 대입한 데 이어, 여기에선 미인을 ‘아름다운 사람’ 또는 ‘얼굴이나 몸매 따위가 아름다운 여자’라는 원래 뜻을 거두고 자기애와 “귀여운 자뻑”으로 여기며 나름의 해석을 더했다. 분명 앨범에서 가장 재미있고 파격적인 트랙이지만, 그만큼 호불호도 갈릴 듯하다.
네모의 꿈
푸른하늘의 ‘오렌지나라의 엘리스’가 신문 사회면을 바라본 유영석이었다면, ‘네모의 꿈’은 사회 풍자를 곁들인 뮤지컬 동화 속 유영석이었다. 아이유는 이 곡을 “‘아기 상어’ 만큼 지금의 어른이들에게 상징성이 있는 곡”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앞선 신중현의 ‘미인’에서 원곡에 없던 시 한 수를 넣더니 ‘네모의 꿈’에선 시대에 맞게 가사 중 조간신문을 스마트폰으로 바꾸는 센스를 발휘했다. 전체 틀에서 원곡과 같게 앙증맞은 셔플 리듬을 중심으로 삼지만, 그 안에 폭죽 같은 코러스는 없다. 물론 그 시절 유영석이 넣은 소규모 악대 편성도 사라졌다. 대신 뚝심 있는 베이스 라인이 이끄는 장난기 어린 디지털 소리, 리듬들이 아이유의 노래를 둥둥 떠받친다. 내 생각엔 인트로에 심은, 8090 아케이드 게임 감성의 티저 영상을 뮤직비디오까지 발전시켰어도 좋을 뻔했다. ‘네모의 꿈’은 ‘빨간 운동화’ 만큼 아이유에게 잘 맞는 곡이다.
시인 T. S. 엘리엇은 말했다. 어설픈 시인은 베끼고, 능숙한 시인은 훔친다고. 이번에도 아이유는 능숙하게 남의 곡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레트로와 트렌드를 모두 집어삼켰다.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네 번째 꽃갈피에서도 아마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