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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ay, [노잼나라] 호주로 갑니다

멜버른으로 떠나는 날

by 이멱여행자

AUSTRALIA

Melbourne

Sydney

Gold Coast

IMG_2225.jpg 로얄 보타닉 가든에서 바라본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그 뒤에 하버 브릿지가, 우측 아래에 루나 파크의 관람차가 살짝 걸려있다

호주는 사실 여행지 후보 목록에서 늘 뒷전이었다.


"호주는 노잼 나라 아니야?"


여행지를 정하던 중 처음으로 호주가 언급됐을 때, 내 입에서 튀어나온 첫 반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 무례한 말이었지만, 그만큼 호주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다. 보통 여행지를 떠올리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기 마련이다. 로마 하면 고대 유적, 파리 하면 에펠탑처럼. 그런데 호주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굳이 생각해보자면 코알라, 캥거루 정도? 최근에 호주를 다녀온 지인이 커피가 맛있다고 했지만, 코알라와 커피를 위해 그 먼 나라까지 갈 순 없지 않은가(물론 지금이라면 그 둘만으로도 다시 방문하고 싶겠지만).


그래서 여행지를 정하는 과정에서 호주는 늘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배제된 건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다시 휴가 계획을 세우던 어느 날 여자친구가 또다시 호주 이야기를 꺼냈다. 그 순간, 마치 스파크가 튀듯 번뜩였다.


"호주, 사실은 재밌을지도?"


그렇게 몇 주간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별다른 이유 없이 호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사실 진짜 흥미가 생긴 건 여행을 결정한 후부터였다. 행선지가 확정되자마자 나는 여행 책자를 구입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종이 책자를 사서 여행을 준비하냐고 하겠지만, 낯선 곳을 탐험할 때만큼은 책자가 최고의 길잡이다. 기본적인 역사, 도시별 특징, 가볼 만한 명소 등 모든 필수 정보가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여행을 위한 입문서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며 '오, 이런 곳이 있네?', '와, 저기는 꼭 가보고 싶다!' 같은 감탄을 연발했다. 호주는 생각보다 넓었고, 예상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호주를 사랑하는 사람이 쓴 생생한 이야기와 감각적인 사진이 더해지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머릿속에서만 펼쳐지던 여행이 드디어 현실이 되려 하고 있었다. 얼마나 흥미로운 모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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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책자를 펼치고 이렇게 멋진 사진과 빼곡하게 적혀있는 글자를 보고있자면 나도 모르게 여행력이 벅차오른다.

지난 여름부터 붙들려 있던 프로젝트가 끝나고, 드디어 긴 휴가를 받았다. 그것도 무려 한 달. 이런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이 시간을 여행으로 가득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계획은 이미 여름부터 세워져 있었다. 다만 이번 휴가는 평범한 일정이 아니었다. 일본 여행을 짧게 다녀온 뒤, 하루 휴식 후 곧바로 호주로 떠나는 일정이었다. 하루만 쉬면 되지 싶었지만, 막상 집에 돌아와서 다시 호주행 짐을 싸다 보니 피곤이 몰려왔다. 일본 여행은 4박 5일짜리 짧은 일정이라 짐을 쉽게 챙겼지만, 호주 여행은 무려 15박 16일. 텅 빈 캐리어와 산더미처럼 쌓인 옷을 바라보며 순간 멍해졌다. 일본에서 돌아와 쉬지도 못하고 다시 떠나려니, 몸이 먼저 지쳐갔다. 아오... 이제 30대인데, 이건 무슨 치기 어린 선택인가 싶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선택한 길이니 가야만 한다. 그래도 어쩌랴, 내가 선택한 길인 것을. 견뎌야 하니라. 15박 16일이라는 긴 여행. 8년 전 세계여행 이후 처음 떠나는 장기여행이었다. 피곤함 속에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새벽 비행기였다. 호주까지는 약 10시간의 비행이었고, 새벽같이 출발해도 도착하면 이미 밤이었다. 사실상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가뜩이나 올빼미 족인 우리에게 새벽 기상은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재작년 이탈리아 여행 때도 새벽 비행기를 탔었다. 짐 싸고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한숨도 자지 못했고, 결국 여행 초반부터 극심한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이번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짐을 미리 싸고, 일찍 취침해서 컨디션을 완벽하게 맞추고 가겠다고. 하지만, 우리가 그럴 리가 없었다.


"짐 싸기 너무 귀찮다."


이 말을 하루 종일 반복한 결과, 짐을 싸기 시작한 시간은 이미 한참 깜깜해진 밤이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캐리어를 펼쳤다. 16일 치 짐을 싸려니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다. 장기 여행은 정말 오랜만이라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이것도 필요할 것 같고, 저것도 챙겨야 할 것 같고, 이 옷도 다 가져가야 할 것 같고… 고민하다 보니 캐리어 하나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될 판이었다. 머리를 쥐어싸매며 겨우 옷을 골라 넣었다.

나는 그나마 여름 옷이 몇 개 없어 대충 챙기면 됐지만, 여자친구는 옷이 많아 시간이 더 걸렸다. 게다가 중간중간 즉석 패션쇼를 하며 옷을 골랐기에 그만큼 시간도 늘어났다. 그렇게 모든 짐을 다 싸고 나니 새벽 1시. 잘 준비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 2시였다. 잘 수 있는 시간은 고작 2시간 정도. 뭐, 이 정도면 선방했다고 봐야 하나. 잠을 잔 건지, 안 잔 건지 모를 정도로 겨우 눈을 붙이고 일어나 집 밖으로 나섰다. 채 몇 시간도 자지 못했는데도 묘하게 정신이 맑았다. 그래, 이제 진짜 떠나는구나. 설렘과 피곤함이 뒤섞인 채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향하는 새벽 공기는 늘 묘한 설렘을 준다. 약간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공항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도로의 가로등과 차량 불빛만이 희미하게 번쩍이는 것이 마치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피로감에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정신이 몽롱해지기도 하고. 하지만 도로 위의 차량이 점점 많아지고 속도가 줄어들면서 멀리 공항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 순간 현실감은 다시 돌아오고 몽롱함의 자리는 설렘이 대신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남반구의 여름으로 떠나는 길이라 가벼운 옷차림이었는데, 새벽 공기는 상쾌하면서도 살짝 추웠다. 몸을 웅크린 채 공항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새벽 시간이 무색하게 공항 내부는 사람들로 붐볐다. 한국 사람들은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피곤함과 설렘, 그리고 약간의 긴박감이 공존하는 새벽 공항 특유의 분위기가 우리도 이제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수하물을 부치는 건 금방 끝났다. 하지만 출국장으로 향하는 게이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일본에 갈 때도 여기서만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그보다는 빠르게 들어갔지만, 여전히 피로감과 설렘이 짜증과 답답함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새벽이라 게이트가 많이 열리지 않아 사람들이 몰려서 대기 시간이 길어졌다. 가고 멈추기를 반복하며 겨우 보안 검색대를 통과했다. 여기까지 들어서면 이제 거의 다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는 비교적 빠르게 통과할 수 있었고, 약 50분 만에 면세 구역으로 넘어왔다. 이쯤 되면 한숨 돌릴 수 있는 시점이었다. 짜증과 답답함이 조금씩 풀리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세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했지만, 이렇게 하다 보면 면세 구역에서 느긋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간단하게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탑승 시간에 맞춰 게이트로 향했다.

tempImagexHs25t.heic 바로 직전 일본 갈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아시아나를 이용했는데 체크인과 수하물 위탁이 전부 셀프였다. 안내 직원분들이 계셨지만 익숙하지 않으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에서 멜버른까지 걸리는 비행 시간은 약 10시간 정도다. 재작년 이탈리아를 갈 때 꽤 고생을 했어서 오랜만의 장거리 비행이 살짝 걱정은 됐지만 이번에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오프라인 저장 영상과 게임기는 기본. 이번에는 양 다리의 붓기를 박살내줄 마사지기까지 대동했다. 인스타그램 광고로 자주 뜨는 그것을 산 건데 이번 여행에서의 활약을 기대하며 구매한 것이었다. 수면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목베개도 아까 면세점에서 구매했고 안대도 잊지 않고 챙겨왔다. 이정도면 아무리 장시간 비행이더라도 끄떡 없을 터였다. 게다가 이번 비행기는 확실히 이전에 탔던 비행기들과 비교해서 앞뒤 너비가 넉넉하고 좌석 자체도 더 편안했다. 역시 믿고 탈 수 있는 국적기인가. 필요한 물품들을 다 좌석 밑에 내린 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서 잠시 기다렸다. 곧 있으면 이륙이었다. 잘 있어라 한국. 잘 있어라 겨울. 내가 간다 남반구의 여름이여. 비행기는 부드럽게 활주로를 박차고 올랐다. 창밖으로 점점 멀어지는 도시의 불빛을 보며, 드디어 떠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비행은 아주 편안했다. 역시나 만반의 준비를 한 덕분일까. 물론 그것도 있었겠지만 훌륭한 기내식도 한 몫했던 것 같다. 보통 기내식은 먹기도 불편한 것이 맛도 딱히 없고 그렇다고 먹지 않기도 뭐해서 괜히 불쾌한 포만감만 채우기 일수인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처음으로 이렇게 괜찮은 기내식을 먹어본 것 같다. 역시 믿고 탈 수 있는 국적기인가.


첫 번째 기내식은 이륙 직후 나왔다. 커리와 불고기 쌈밥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었는데, 예상외로 쌈채소가 깔끔하게 나와서 먹기 편했다. 중간에 간식으로 부리토가 한 번 제공됐다. 부리또는 냉동식을 덥혀서 나오는 거였는데 그게 꽤나 훌륭했어서 나중에 집에서 한번 사먹어보고 싶을 정도로 괜찮았다. 도착 2시간 전에는 두 번째 기내식이 나왔다. 메뉴는 생선 백반과 소불고기 덮밥 중에서 골랐다. 여자친구와 각자 다른 메뉴를 선택했는데, 둘 다 꽤 훌륭해서 "마지막 한식이 이 정도면 괜찮네"라는 농담이 오갔다. 배고플 타이밍이 딱 맞게 기내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고, 편안하게 충분히 잠도 자면서, 다리가 뻣뻣할 때는 챙겨 간 마사지기로 혈액순환도 해줬다. 이렇게까지 준비를 열심히 해 간 비행도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하니 10시간이 순식간에 흘러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역시 준비는 배신하지 않는다. 그렇게 평안한 비행 끝에 현지 시각으로 밤 9시쯤 멜버른 공항에 도착했다. 점점 땅에 가까워져오자 넓게 펼쳐진 숲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의 열기를 머금은 듯 녹색푸름이 짙었다. 적도를 넘어왔다는 사실이 실감나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 "호주에 진짜 오긴 왔구나!"

(이쯤되면 비행 중 바깥 사진이나 기내식 사진이 나와야할 타이밍일테지만 놀랍게도 우리 모두 사진이 단 한장도 없었다. 정말 비행 컨디션에 집중한 나머지 사진을 찍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우리. 충실하게 휴식하면서 비행에 집중했기 때문에 조금은 덜 피곤했을지도. 그래도 다음에는 글 쓸 생각하면서 자료 화면 정도 쓸만한 것들은 좀 찍어와야 하지 않을까?)

tempImagetJOUV4.heic 아 이런 사진은 있다. 보기와는 다르게 아주 편안하게 숙면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tempImageKBaD1X.heic 도착했다, 멜!

멜버른 공항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우버 픽업 방식이었다. 보통은 앱에서 기사와 승객이 매칭되고, 기사가 공항 바깥에서부터 들어오느라 시간이 걸리곤 한다. 그런데 이곳은 목적지를 입력하면 고유 코드가 생성되고, 지정된 우버 탑승 구역에서 그 코드를 대기 중인 기사에게 보여주는 시스템이었다. 이 방식이라면 우버의 단점을 꽤 보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옆에는 일반 택시 탑승 구역도 있었고, 기사들이 "택시! 택시!" 하고 호객행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버가 이렇게 편리하면 굳이 택시를 타려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한국이라면 택시 업계가 들고일어날 법한데, 어차피 우버 서비스 자체가 불법으로 막힌 나라가 한국이니 그런 상황이 생길 가능성조차 희박하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하는 길에 벌써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걸 보니, "여행 오길 잘했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우버 택시를 타고 우리는 공항을 벗어나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어둠이 깔린 멜버른은 아직 뭔가를 느끼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다만 우핸들에 좌측통행인 자동차와 도로가 이곳이 한국이 아닌 호주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생소함이었다. 감각이 점점 날카로워지며 호주의 생경함이 점차 많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영어 방송이며, 창 밖으로 보이는 고속도로 광고판에 써져있는 알 수 없는 브랜드와 문구들. 그래, 정말로 한국을 떠나 호주에 도착했다. 아직은 낯설지만, 이곳에서 펼쳐질 15일의 여정이 기대됐다. 어둠 속에 감춰진 진짜 호주, 진짜 멜버른을 한 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30분 정도를 달렸을까, 우리는 금방 시내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작은 거실이 따로 있어 생각보다 방이 넓었다. 어메니티는 다소 부실했지만, 널찍한 공간이 주는 편안함이 마음에 들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한숨 돌리니 밤 11시가 다 돼 있었다. 비행기에서 먹은 기내식이 오늘의 마지막 식사였으니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즐길 수 있는 펍을 찾고 싶었지만, 주변에는 중국 요리점뿐이었다. 아니, 여행 첫 날에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펍이 없다니. 약간은 시무룩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러고있자니 허기가 더 밀려올라왓다. 하지만 그렇다고 호주까지 와서 마라탕과 훠궈로 첫 끼를 때우고 싶지는 않았다. 밤까지 영업하는 마라탕 가게들 덕분에 거리가 비교적 밝았다. 덕분에 우리는 다른 식당을 찾기 위해 밤거리를 좀 더 안전하게 활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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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에서의 첫 음식이 마라탕일 수는 없다는 처절한 몸부림

한참을 헤매다 ‘Hungry Jack’s Burger’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호주 로컬 브랜드인가?"라고 생각했지만, 매장 안 메뉴와 폰트가 버거킹과 똑같았다. 우리 둘은 순간 눈이 마주쳤는데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거 버거킹 짝퉁 아니야?!'

tempImageipY3uy.heic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그 무언가의 경계선 어느 근방에 있는 듯한 아닌 듯한...암튼 그런 느낌의 로고

(다음 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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