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호주다운 식사]에 대한 고민 01

멜버른 2일차

by 이멱여행자

호시어 레인에서 사진을 찍느라 한껏 신이 났는데, 골목을 빠져나올 때쯤 갑자기 배에서 신호가 왔다. 아침에 플랫화이트와 소고기 랩을 간단히 먹었을 뿐이었으니 허기가 몰려올 만했다. 게다가 어제 저녁도 헝그리잭스 버거로 때웠던 터라, 제대로 된 ‘여행지의 첫 끼’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느끼는 건데, 식사는 정말 여행의 핵심 요소다. 어떤 음식을 먹을지 고민하는 과정부터 하루의 기대감을 높이고, 음식의 맛과 분위기는 그 하루의 기분을 완전히 좌우하곤 한다. 평소에는 음식에 특별히 큰 욕심을 부리지 않지만, 여행지에서의 식사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 이상이다. 여행지에서 먹는 음식은 그 도시의 분위기와 느낌을 가장 원초적이고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번 호주 여행에서도 ‘호주다운 식사’를 꼭 경험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호주다운 음식’이 무엇인지 떠올리려니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캥거루 고기를 먹어야 하나? 물론 나중에 캥거루 스테이크도 먹어보긴 했지만, 특별한 음식을 먹는 경험보다는 호주만의 느낌을 담은 식사를 맛보고 싶었다. 예를 들어 한식이나 중식, 일식이라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는데, 호주 음식은 그런 이미지가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첫날부터 “호주에서는 뭘 먹어야 하지?”라는 고민이 커져만 갔다.


여행을 마칠 때쯤에는 내 나름대로 '호주식 식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여러 답을 찾아냈는데, 그중 가장 확실한 건 바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이라는 결론이었다. 멜버른 거리를 걷다 보면 호주 음식점보다는 세계 각지의 식당들이 훨씬 많이 볼 수 있다. 처음 도착한 밤거리엔 온통 마라탕집이 많아서 차이나타운인가 싶었는데, 도심을 더 깊이 둘러볼수록 다양한 나라의 음식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국, 중국, 일본, 이탈리아, 프랑스 음식점은 물론이고 이란 음식점까지 눈에 띄었다.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찾다보니 아프가니스탄이나 튀르키예 식당까지 보였다. 결국 15일 동안 ‘진짜 호주 음식’을 먹은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호주에 있는 동안 먹었던 비호주식 식사. 호주식 음식만 고집하다간 쫄쫄 굶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민자의 나라인 호주에서 세계 음식이 많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호주의 세계 음식점들은 현지의 맛을 매우 정통에 가깝게 재현하고 있었다. 보통 다른 나라의 음식은 현지화된 맛을 내는 경우가 많은데, 호주에선 정말로 본토에서 먹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멜버른에서 방문한 한식당은 한국의 동네 식당 맛과 다르지 않았고, 칼튼의 라멘집은 마치 일본 현지에서 먹던 맛 그대로였다. 심지어 숙소 근처에 있던 한 마라탕집은 맛 뿐만 아니라 내부 인테리어가 마치 본토에서나 볼 법할 정도로 강렬했고 이란 음식점에서 먹은 요구르트의 독특한 맛은 마치 이란 현지를 여행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마라탕집이 이렇게까지 화려할 일인가

"호주까지 와서 무슨 중식당이야, 무슨 일식당이야?"라는 생각이 솔직히 없었던 건 아니다. 처음엔 더 특별한 음식을 찾고 싶었지만, 막상 거리를 돌아다녀 보니 호주는 오히려 이런 다양성이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는 이민자들의 나라답게, 미국 못지않은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멜팅팟'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시 지금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점심은 근처 상하이풍 중식당에서 해결했다. ‘상하이’라는 이름이 붙어있긴 했지만 메뉴는 대부분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음식들이었다(샤오롱바오 정도만 예외였다). 마파두부 덮밥과 궁보계정(공바오지딩) 누들을 주문했는데, 마파두부 덮밥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지만 궁보계정 누들은 기대에 못 미쳐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나름대로 절반의 성공이라며 스스로 위로를 하며 식당을 나왔다.

마파두부 덮밥 & 궁바오지딩 누들
샤오롱바오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나니 발걸음이 다시 가벼워졌다. 도시를 걷다가 흥미로운 골목이나 가게를 발견하면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우연히 들어간 서점에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베스트셀러 코너에 진열된 걸 발견하고는 괜히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우리는 명목상으로 지도에 목적지를 정해놓긴 했지만 계속해서 샛길로 빠지며 길을 걸었다. 이렇게 여기저기 마음 내키는 대로 멜버른의 골목골목을 누비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진정만 묘미이자 힐링이 아닐까<>

뮤지컬 시스터액트를 공연 중인 것 같은 멋드러진 극장
어느 서점에서 만난 한강 작가의 책. 반가웠다.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04화멜버른에서는 트램이 [공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