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멜버른에서는 트램이 [공짜]다?

멜버른 2일차

by 이멱여행자

(*현업에 치이다가 이제야 올리게되는 멜버른 2일차...)

카페에서 플랫화이트와 동그랑땡(?)을 연상시키는 간단한 간식으로 허기를 채운 뒤, 시내로 향하는 트램을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트램은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교통수단이라 그런지 늘 낭만적인 상상을 자극한다. 지상 위로 천천히 전차가 지나가는 모습 때문인지, 혹은 근현대적인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지난해 홍콩에서 마주한 좁고 높은 2층 트램은 마치 애니메이션 속 장면처럼 빌딩 숲 사이를 누비며 여행의 감성을 자극했었다. 멜버른의 트램은 홍콩의 그것보다 좀 더 현대적이었지만, 간혹 오랜 세월을 간직한 듯한 트램이 지날 때면 묘한 설렘이 일었다.

일반적인 트램의 모습
특정 노선에는 이렇게 오래된 트램이 달리기도 한다

멜버른 트램 시스템의 가장 큰 매력은 단연 ‘무료 트램 존’이다. 시내 일정 구역 내에서는 별도의 요금 없이 자유롭게 트램을 이용할 수 있었고, 여행자들이 찾고 싶은 주요 명소 대부분이 이 구역 안에 포함되어 있어 편리했다. 여행 중엔 아무리 가까운 거리도 걸어서 10분은 기본인데, 여기서는 트램만 타면 어디든 금세 도착했다. 무료 트램 존이 없었다면 여행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생각만 해도 갑갑했다. 야라 강 남쪽이나 노스 멜버른처럼 일부 지역으로 벗어나면 교통카드를 찍어야 했지만, 게으른 여행자인 나는 그저 시내에서만 맴돌아 교통카드를 구입할 일이 없었다(하하). 교통카드 구매 방법이 궁금하다면 다른 글이나 유튜브를 찾아보는 편이 낫겠다.

무료트램존 안에서는 자유롭게 무료로 트램에 타고내릴 수 있다

바퀴가 철로 위를 굴러가는 부드러운 진동과 소리가 퍼지며 트램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보다는 느리지만 도심을 가로지르며 도시의 풍경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점이 트램만의 특별한 매력이었다. 창밖으로 멜버른의 풍경이 느긋하게 흘러갔다. 현대적 고층 빌딩과 100년 이상 자리를 지켜온 빅토리아풍 건물들이 뒤섞여 독특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들에는 다양한 가게들이 들어섰고, 그 뒤편으로 현대적 빌딩이 배경처럼 서 있었다.


19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들과 기차역, 북적이는 교차로, 현대적인 광고판과 공사 현장이 한데 뒤섞인 모습은 이질적이면서도 독특했다. 유럽이 과거의 모습을 온전히 간직한 박물관 같은 느낌이라면, 미국은 유럽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신세계를 만들어낸 느낌이다. 하지만 호주는 그 어느 쪽과도 닮지 않았다. 현대적 빌딩과 빅토리아풍 건물이 공존하는 풍경은 호주와 멜버른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트램은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에 도착했다. 멜버른 여행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역은 높은 시계탑과 우아한 빅토리아풍 외벽, 웅장한 돔 천장이 어우러져 여행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제 묵었던 호텔 근처 중국 음식점이 밀집한 거리와는 또 다른 활기가 느껴졌다. 세계 각국의 음식점과 매력적인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역 주변을 생기 있게 오갔다. 역 맞은편 오래된 펍에서는 사람들이 낮부터 맥주를 즐기며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고, 그 옆 대성당에서는 차분한 성찬 예배가 진행 중이었다. 잔디밭에서는 갈매기들 사이에서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다양한 풍경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모습을 보며 "아, 멜버른은 이런 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호주가 어느새 내 세계에 성큼 들어온 기분이었다.

대성당을 지나 자유분방한 그래피티로 유명한 호시어 레인(Hosier Lane)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멜버른을 이야기할 때 그래피티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눈높이에 그려진 작품들은 물론이고, 어떻게 올라갔을지 궁금할 만큼 높은 벽이나 심지어 고속도로 표지판 위처럼 위험하고 아찔한 곳에도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었다. 높은 위치에 그림을 남기는 것이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에게는 하나의 미덕이라는데, 어렵게 그린 만큼 지우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란다. 물론 당연히 아무 데나 그리는 게 합법일 리 없다. 아티스트들은 도시 곳곳에 몰래 자신의 작품을 남기지만, 호시어 레인은 합법적으로 그래피티를 그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다. 어두운 뒷골목을 화려한 예술로 채워 도시의 그늘진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노력인 셈이다.

호시어 레인에 들어서자마자 화려한 그래피티가 눈앞에 펼쳐졌다. 빈틈없이 채워진 그림들로 여백의 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다른 차원으로 순간 이동한 듯 낯선 기분이 들었다. 시각적인 화려함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면, 골목 특유의 지린내가 강렬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화려한 예술과 불쾌한 냄새 사이에서 내 감정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잠시 후 냄새는 금세 적응이 됐고, 그 불쾌함마저 화려한 그래피티로 덮으며 골목을 걸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빅토리아 시대를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공간이 뒤섞인 그래피티의 세상으로 들어온 듯 정신이 아찔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인 듯한 이런 자유로움이 멜버른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어서)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03화노우 카페라떼, 예스 [플랫화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