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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무하 Jun 25. 2024

질투하는 사회

샤덴프로이데의 시대

장기하의 노래를 좋아한다.

특히 '부럽지가 않어'는 명곡이다.

회식자리에서 한번 뽑아보려고 연습해 보았지만

무리였다.


나는 '부러움'이 많은 편이다.


남에게 관심을 두는 성격은 아니지만,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보면 언제나 부럽다.

'어쩌면 같은 말을 저리도 멋지게 표현할까?'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난 죽어라 연습해도 안 되는데.


살가운 딸이 있는 부모를 보면  부럽다.

난 세상 무뚝뚝한 아들만 둘이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란 말이 사실이라면

난 매일 누군가에게 지면서 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의 부러움은

시기(猜忌) 

질투(嫉妬)이어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몇 년 전 한국인 독일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성과주의 사회에 대한 부작용을 우려하고, 또 경고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세상은 그의 말대로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늘어만 가는 자칭 '낙오자'들은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킨다.


다른 이들을 질투하고, 혐오하기 시작하였다.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이나,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평생 불평등을 체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실제 불평등이던 아니던 상관없이)


불평등은 언제나 '혐오'와 '투쟁'으로 이어진다.


적극적인 사람은 '투쟁'으로

소극적인 사람은 최소한 '혐오'라도 해야 분이 풀린다.


우리 사회가

샤덴프로이데의 시대라는 것을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쌤통의 심리학'의 저자 리처드 H 스미스는

부러움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유순한 부러움,

경쟁적인 부러움,

악의적인 부러움


여기에서 악의적인 부러움이 문제다.

악의적인 부러움은

부러움의 대상이 실패하고, 바닥으로 떨어져야 나에게 기쁨을 안겨준다.

그래서 남의 실패를 위해 애쓴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보면

질투는 사회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할 때가 있다고

저자는 말하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고 싶다.



부러움이나 질투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일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남의 불행이

나의 기쁨이 되는 세상은

오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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