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는 말이야, 너희들 나이였을 때 인도에서 살았어
인도에서 생활 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 어느 정도 기숙사와 학교 생활 패턴을 익히고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이 향수병은 짙어지고 있었다.
그날은 처음 가족과 통화를 하던 날이었다.
"Cho! You have a phone call!"
나를 다급히 부르던 친구들의 목소리에 허겁지겁 전화를 받으러 달려갔다.
각 기숙사마다 수화기가 설치되어 있었고, 발신 전화만 가능했다.
"여보세요? 아빠?"
"어~~ 딸! 잘 지내고 있지? 목소리 들으니까 씩씩하네!"
"아빠 나 여기서 꺼내줘, 여기 너무 싫어 그리고 여기 애들 다 못생겼어"
오랜만에 들은 아빠 목소리라 그런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우는 목소리를 들키기 싫어서 괜히 장난치듯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빠 근데 휘진, 성민 오빠들이 나한테 말을 안 걸어"
그렇다. 인도 학교에 들어간 지 일주일 내내 그 형제들은 나를 본체만체하였다. 의지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영문도 모른 체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후에 형제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날 아버지와의 통화 이후 휘진, 성민 형제들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전화로 혼이 났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 형제들은 나의 빠른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일부로 말을 걸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후배 사랑 그리고 스파르타 교육인가 그때 우리의 나이는 고작 15, 16, 17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가끔 철없고 얄미운 행동을 하긴 했어도 생각이 깊은 형제들이었던 것 같다.
다른 친구들도 전화를 해야 했기 때문에 가족들과 전화를 10분 만에 끝내야 했다.
나는 좀 더 길게 통화할 수 있게 가족들에게 주말마다 잠 자기 전 시간으로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오랜만에 가족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은 힘이 났지만, 금세 끝난 전화에 대화를 다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다음번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공책에 적어서 다 전달하겠노라 다짐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밥을 먹기 싫어 깨작깨작 거리니 옆에 앉은 친구들이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고 핀잔을 주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들의 말을 무시했고,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Vilashini는 사감에게 달려가 내가 음식을 남기고 있다고 일러바치고 있었다. 얄미운 그녀에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당시 영어를 할 줄 몰랐던 나는 그녀를 째려보는 것이 내 유일한 분노 표출이었다.
식사 시간이 끝나고 사감이 기숙사로 나를 불렀다.
'밥을 남겨서 혼내려고 그러시나? 그러면 나도 한국어로 욕해야겠다. 이런 쓰레기 같은 밥을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더 끔찍한 난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학교 교복이 배달 온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입은 교복을 보고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너무 이상해 보였다.
파란색, 하얀색 긴 멜빵 치마에, 반팔 티셔츠, 촌스러운 학교 넥타이, 블레이져, 구두, 양말
더 싫었던 복장 규제 중 하나는 여학생들은 머리를 양 갈래로 한 후 흰색 또는 검은색 리본을 양 갈래에 묶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규제가 너무 싫었던 나는 사감과 대립을 하기 시작했고, 내 고집을 꺾기가 힘들었는지 Senior 기숙사에 있는 Edger 사감에게 나를 데리고 갔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머리를 그렇게 묶기 싫다고 했다,
고집도 부려보고 어쭙잖은 영어 실력으로 하기 싫은 내 권리도 존중해 달라며 소리쳐봤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렇게 입기 싫은 교복과, 머리 스타일을 하고 학교에 들어갔는데 휘진, 성민 형제들이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웃기다며 놀려댔다. 서러웠지만 우스꽝스러운 나의 모습이 그런 것을 어쩌겠는가
영락없는 사춘기 소녀라서 그런가 외모에 부쩍 관심이 많았던 나는 학교 수업 내내 이 우스꽝스러운 내 모습이 신경 쓰였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침에 교복 사건으로 인해 기분이 굉장히 저기압이었던 나는 결국 손으로 밥을 먹기 싫어서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친구들과 사감은 저 한국인 또 우냐면서 학을 떼었고, Pema와 Vilashini가 그런 나를 달래주고 있었다.
인도에서의 생활은 정말 최악이었다.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말귀도 못 알아들으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어려웠다.
학교 수업 중에는 맨날 엎드려 있었으며, 학교 안을 지나다니다 보면 다른 학년 학생들이 나를 보고 히히덕거리기도 했고, 귀신 같이 생겼다며 인종 차별을 하기도 했다.
인도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 왼손으로 뒷 처리를 하는데에 반면 한국인들이 휴지로 볼일을 본다고 하니 외계인 같다고 더럽다고 했다. (심지어 Senior 기숙사 사감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음)
그럴 때마다 그 학생들과 형편없는 영어 실력으로 싸우기도 했고, 물건을 던지며 한국어로 욕을 했다.
매번 수업 시간에 졸고, 수업을 안 듣고 딴짓을 하던
나의 태도에 선생님들이 지적을 할 때면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선생님들에게 한국어로 면전에다가 욕을 하며 소리치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나를 보며 혀를 찼고, 굉장한 골칫 덩어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학 당시 인도에 이미 환멸을 느낀 나는
'후진국 나라에 사는 주제에 어떻게 나를 이런 식으로 대우할 수가 있지?' 하는 고약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나를 챙겨주려 했던 친구들도 내가 말귀를 못 알아듣고 고집을 부리니 점차 지쳐가기 시작했고,
나와 거리를 두는 게 눈에 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지냈던 Junior기숙사 학생들은 나보다 다 나이가 어렸고, 다 부모님 곁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어서 본인을 챙기기에도 벅찼을 것이다. 그런데 옆에서 내가 그렇게 생떼를 부리고 있으니 지칠 만도 했다.
이런 고집불통에 제멋대로인 나를 기숙사 룸메이트들이 감당을 못해 내 곁을 떠나갔다.
그것을 눈치챈 Senior 기숙사에 있던 티베트인 Lhadon 이 나를 자주 챙겨 주었고, 그 기숙사에 있던 선배들도 나를 신경 써주곤 했다.
Junior 기숙사에 있으면 외로울 때가 많았다. 룸메이트들은 서로 친해 보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만 혼자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왜 나는 인도라는 곳에 오겠다고 했을까, 왜 이런 상황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
그들은 왜 이런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외국인인 나에게 모든 것을 참고 받아들이라는 것인지,
아직 인도라는 나라에 적응하지 못한 나에게 이곳에 얼른 적응해서 문화를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다. 그때는 고작 15살 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들 또한 나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누렸던 모든 편리함들, 부모님 밑에서 안락하고 평화롭게 지내며 무엇이든 쉽게 가질 수 있고 또 쉽게 포기할 수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이 이곳에선 당연하지 않았다.
인도학교에서 생활하는 외국인 미성년자가 보호자도 없이 자유롭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곳에서는
혼자 스스로 결정하고 움직여야 했으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내가 감당해야 했다.
인도뿐만 아니라 집을 나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에게 타 지역은,
타 국가는,
인도는 바로 그런 곳이다.
아무도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 곳 그렇다고 해서 나를 반기지 않는 곳
내가 아무리 어린 유학생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겐 나는 초대받지 않은 이방인이다.
내가 스스로 터득해 살아남아야 하는 이 낯선 땅에서
나는 15살 이방인, 불청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