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브 피피
아무리 외워도 말은 안 나오더라고요
"부디 배우신 표현을 써먹어 주세요."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시려고 배우시는 것이잖아요."
시키는 대로만 쓰인 것을 암기만 하는 '착실한' 공부로는 '언어의 자유'에 이를 수 없음을 알기에 수업 자료에서 코칭에서 심지어 저녁 만남까지도 나는 도시락 싸들고 써먹기을 강조하는 잔소리 쟁이기 된다.
실제로 매일의 생활에서 쓰이는 말을
흐름과 결을 느끼며 익히고
내 입으로 말해야만 비로소 배움이 가능하기에.
틀리면 어떻게 하냐는 물음에 나는
부디 틀려보시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마구 질러보셔야 비로소 내 것으로 체화가 된다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해브 피피로 외워서 말이 되던가? 우드가 윌의 과거???
이리 암기하면 절대로 말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실제 쓰이는 생영어와 내 말로 '써먹기'를 주창한다.
말 그대로 진심을 전하는 도구로서의 영어이다.
배움의 목적지는 '써먹기', 즉 적용이다. 악기를 배웠으면 그 악기를 내 손가락을 써서 다룰 수 있어야 하고, 말을 배웠으면 자고로 내 말을 담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지선다 찍기가 종착점이 될 수는 없다. 배웠으면 바뀌어야 맞다. 아주 작은 변화라도 말이다.
수능 영어, 심각하다. 도대체 써먹지를 않는다는 것. 시험 영어는 다 그런 줄 알았지만 아니더라.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유럽의 어떤 나라도 글을 읽고 사지선다 문제를 찍고 마는 식의 교육을 하는 곳은 없더라. (이 부분은 영어공부는 싫은데 원어민과 대화는 하고 싶어- 폴란드 입시 영어를 예를 들어 설명했다) 내 생각을 담아 말하고, 내 상황을 설명하는 글을 쓰는 과정이 교육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했고 그 과정을 거치는 학교 교육 만으로도 영어를 말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학교에서 배운 영어로 충분히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들에게는 상식이었다.
충격적 이게도 말이다.
윗 분들이 공교육의 문제점을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잘하는 아이들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아이들이 받는 교육을 바꿔서 그들을 끌어올리는 것이 맞다.
난 학교에서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폴란드의 고등학교에서는 모든 과목에서 자신의 생각을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 과정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유독 우리만 한국인만 뒤떨어진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 중고등생들의 학습효율화 지수는 OECD 30개 회원 중 24위에 그쳤다고 한다. '학습 효율화 지수'는 PISA점수를 학습 시간으로 나눈 수치다. 우리는 늘 높은 학업 성취도에 대해 말하지만 여기 이면에 담긴 의미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루 종일 책상머리에 앉아 있기 때문에 나온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효율성은 최하위인데 성적은 최상위라는 말은 우리가 얼마나 미련하게 공부하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티처 보이라는 말이 있다. 교사 없이는 전혀 공부하지 않는 학생을 말한다. 이 학원 저 학원에 돌리면 학원 숙제만 해도 시간이 모자란다. 남이 시킨 것만 다 해도 다행인 상황에 놓이기가 부지기수이다.
네 의견이 뭐니?라고 물을 필요도 묻는 이도 없는 교육이 되어 버린다. 공부는 그저 찍기 시험의 점수를 잘 받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렸다.
교육의 어원은 '안에서 밖으로'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끌어내는 '진짜 교육' 이 설 자리가 있을까?
내가 이리 열창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내가 받은 교육이 과연 맞을까 라는 회의, 그리고 우리 아이들 세대에서는 인류에 기여하는 노벨상 감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와줘야 하지 않을까 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젠 그럴 때가 되었다.
요즘 유대인 교육과 하브루타를 체험하고 공부하며 내가 느낀 그들의 비결은 바로 '적용'이다. 배움을 어떻게 써먹을지를 생각하게 한다.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내가 사는 이 곳의 일상에서 말이다. '노답인 나댐' 즉, 답이 없는 대답을 마구 질러보는 일을 환영하는 교육, 배운 것을 향한 내 목소리를 낼 기회를 주는 교육은 확실히 기존의 교육과는 결이 달랐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라는 질문은 있을지언정 정답은 없었다.
내 것으로 써먹는 교육
노답인 배움을 꿈꾸며 오늘도 하루하루를 설레는 마음으로 당겨온다.
누구의 탓도 말고 이젠 한국의 학부모들이 움직여야 할 때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이젠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때가 되었으니까.
써먹는 시도를 마구 던져보는 당신
특히 노답인 아이를 격하게 응원하는 이유이다.
전 책상머리에 앉아 연구하는 교수님도
이론가도 아니요,
심지어 신사임당처럼 자애로운 엄마도 아닙니다.
회의 하기 직전에도 저녁 차려놔야 하고
얼른 재워놓고 일해야 하기에 아이에게 빨리 씻으라고 닦달하며
5분 시간을 못 내서 머리에 김이 나도록 아이디어를 짜내다
중간에 말을 거는 아이에게 성질을 내는
평범하지만 치열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꿈을 꿉니다.
노벨상을 탈 아이들을 키워낼 교육을 이룰 것이라고
매일의 일상을 통해서 나를 실험해보고
책을 읽고 심정섭 하브루타 전문가 선생님께 배우고 체험하고 또 생각해 보고 아들에게 조카에게 또 적용합니다.
제 실수가 제 작은 생각이
후천적 이중 언어자의 부모님께
마중물이 되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