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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혼잣말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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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산팔육 Nov 17. 2019

외할아버지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내 방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잡념을 하며 뒤척이는데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안방에 외할아버지가 주무시니 잠을 잘 거면 할아버지와 같이 자라 하였다. 나는 무려 6학년이나 되어 누군가와 한 침대를 쓴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엄마의 요구가 느닷없었던 탓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의 외할아버지는 곧고 정한 자세로 주무시고 계셨다. 나는 그 옆에 슬며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어릴 때에는 그토록 할아버지만 쫓아다녔건만 단둘이 있은지도 오래되었다. 그 기분이 생경하여 그날의 천장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우리 집은 맞벌이였던 부모님들 사정으로 외가댁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외할머니가 주로 누나들을 돌보았고 나는 외할아버지 손에 자랐다.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늘 아들이 귀하다고 하셨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도 외할아버지가 있다. 할아버지는 나를 유모차에 태우고 한참을 걸으셨는데, 끝에 도착한 곳은 할아버지 친구들이 누워 쉬는 곳이었다. 노인정이었을까. 아무런 빛도 소리도 없는 기억이지만 비포장길에 흔들리던 유모차와 할아버지들의 낯익은 인사들이 꿈처럼 기억이 난다. 아직도 기억하는 것을 보면 분명 꿈은 아니었다.


엄마는 내가 차멀미를 하는 건 어릴 때 외할아버지가 유모차를 너무 많이 태워 그렇다고 웃으며 말한다. 나는 유모차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나 할아버지가 타 주시던 설탕커피는 잊지 못한다. 지금 서하를 키우는 유리가 들으면 경악하겠지만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 오시면 늘 내게 커피를 타 주었다. 엄마가 외할아버지를 위해 채워두었던 커피와 설탕을 아이 입맛에 맞춰 섞은 자판기 맛의 설탕커피였다. 그때는 커피가 귀한 음식이라 특별히 내게만 주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3학년, 같은 반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 놀고 있는데 외할아버지가 오셨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엄마가 아직 집에 오지 않았다 얼른 전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부엌에서 커피 두 잔을 타고는 소파에 앉아 잠시 쉬는 듯했다. 얼마 되었을까. 현관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 친구들과 달려 나가 보니 할아버지가 바닥을 짚고 일어나고 계셨다. 옆에서 멀뚱히 쳐다보는 내게 할아버지는 괜찮다며 얼른 현관을 나섰다. 현관을 나선 할아버지가 대문을 나서기까지는 커피를 타는 만큼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 나서 내가 다시 외할아버지를 만난 것은 대학에 와서 고시 생활을 하던 무렵 병문안을 갔을 때였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곧고 정한 자세로 주무시고 계셨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잠에서 깬 할아버지는 말을 하지 못했고, 대신 엄마가 큰 소리로 얘기하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고개를 저었다. 문득 할아버지가 우리를 보며 병상 옆의 작은 서랍을 가리켰다. 서랍을 열어보니 동전들로 가득했다. 엄마는 큰 소리로 손짓의 의미를 물었지만, 할아버지는 그저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엄마는 익숙한 듯 큰 소리로 다른 화제를 꺼냈다. 얼마 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따분해진 나는 화장실을 가겠다며 먼저 일어섰고, 그렇게 입원실을 나가는데 큰 커피 자판기 하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제야 할아버지 손짓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최근 서하가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크는 것을 보며 이따금씩 외할아버지를 생각하게 된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은 주로 단편적이고 대부분 무질서하다. 중간중간이 사라지거나 짙은 인상으로만 남겨진 기억의 편린들이 이제는 정말 꿈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꿈에서 깨어보면 늘 슬픔이며 회한이며 마음에 가라앉는 앙금 같은 것들이 밀려온다. 할아버지를 큰 소리로 불러보지 못한 것이, 할아버지를 더 귀하게 여기지 못한 것이, 자꾸 아쉽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같이 누웠으면 좋았을 것이다. 현관에서 쓰러지셨던 날은 대문까지라도 배웅했어야 했다. 그랬으면 한번 즘은 진짜 할아버지 꿈을 꾸었을지도. 그래서 기저귀와 마실 물을 싣고 가쁜 숨을 내쉬며 유모차를 끌고 가는 할아버지를 만났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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