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한 장면으로만 재단할 때
사람 사이의 관계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이가 있으면, 그 사람까지 함께 밉게 느껴진다. 조선 후기의 당쟁도 이 심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사상과 명분을 내세운 싸움이었지만, 그 속에는 친구에 대한 기대와 서운함, 질투와 불신 같은 아주 인간적인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누군가를 ‘사문난적’이라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비난을 넘어선 일이었다. 성리학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반역자, 더 이상 같은 세계에 둘 수 없는 존재라는 선고였다. 한 번 낙인이 찍히면 제자들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리기를 두려워했고, 글과 제향에서 그의 자리는 지워졌다. 파문은 곧 사회적 추방이었고, 경우에 따라 실제 형벌과 목숨으로까지 이어지곤 했다.
서양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중세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신성 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자, 황제는 한겨울 눈 덮인 카놋사 성 앞에 서서 사흘 동안 용서를 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고 권위로부터의 파문은 한 인간이 공동체에서 완전히 밀려난다는 뜻이었다. 조선의 ‘사문난적’이라는 낙인도, 그에 견줄 만큼 무거운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조선의 붕당 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는 17세기였다. 그 이전의 당쟁이 주로 정국 운영을 둘러싼 의견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면, 이 시기에는 학통과 사상의 정통성을 놓고 다투는 싸움으로 굳어졌다. 어느 편에 서느냐가 곧 어떤 스승의 문하에 서 있는가, 어떤 해석을 따르는가와 직결되었고, 한 번 갈라진 줄기는 다시 잇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 시기의 여론을 쥐고 있던 쪽은 서인 가운데서도 주자 성리학의 정통을 자처한 그룹이었다. 그 중심에 우암 송시열이 있었다. 반대편에는 경전을 새롭게 읽고자 했던 윤휴가 있었다. 두 사람의 다툼은 단순한 인물 간의 갈등이 아니라, ‘정통’과 ‘변통’을 둘러싼 사상 싸움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사이를 잇고자 애쓴 이가 윤선거였다. 그는 송시열의 오랜 친구이자 같은 문하에서 공부한 동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윤휴와도 교유를 이어가며 둘 사이를 화해시키려 했다. 산사에서 둘을 불러 밤늦도록 설득하고, 스스로 남인들과도 교류하면서 막혔던 대화를 열어보려 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송시열은 결국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규정한다. 주자의 주석을 벗어나 경전을 해석했다는 이유였다. 윤휴는 사약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내 글을 쓰지 않겠다고만 하면 될 일을, 굳이 죽일 것까지 있었을까.” 주자의 학설이 곧 정통으로 굳어진 조선에서, 다른 길을 모색했다는 사실 자체가 죄목이 되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죄목은 그것뿐이었다.
이 비극의 배경에는 전쟁이 있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두 갈래로 흩어졌다. 세자와 왕자들은 강화도로, 임금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몸을 옮겼다. 이듬해 1월,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끌려갔고, 강화에 남아 있던 김상용과 김여물 같은 원로 대신과 수많은 관료·노비·시종들은 불 속으로 뛰어들며 목숨을 끊었다. 모두가 그 자리에서 삶을 마감한 것은 아니었다. 성문이 무너지는 혼란 속에서 살아서 빠져나와 남한산성 방향으로 향한 이도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윤선거였다.
윤선거의 아버지 윤황은 남한산성에서 임금을 모시고 있었다. 훗날 윤선거는 “아버지를 남겨 둔 채 자식이 먼저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 성을 빠져나왔다고 설명했다. 살아남은 자신을 평생 부끄러워하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내려가 학문과 교육에만 힘썼다. 그러나 같은 시기, 남한산성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송시열의 눈에는 이 모습이 달리 보였다. 모두가 순절을 택하던 자리에서 혼자 살아 나온 일은 선비답지 못한 처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갈등은 시간이 흐른 뒤, 또 다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세월이 지나 윤선거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윤증은 아버지의 삶을 정리하는 행장을 부탁하기 위해 한때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찾는다. 행장은 죽은 이의 일생을 기록하는 글로, 대개는 장점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첫머리에 “병자년, 그대는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문장을 적었다고 전해진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살아 나왔던 일을 빗대어, 그의 삶 전체를 그 한 순간의 선택으로 눌러 찍는 한 줄이었다.
윤증은 이 표현을 고쳐 달라고 논산에서 회덕까지 여러 차례 오가며 간청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미미한 자구 수정뿐이었다. 말의 뼈대는 바뀌지 않았다. 결국 윤증은 더 이상 스승으로 모실 수 없다고 판단했고, 사제의 연은 끊어졌다. 이 감정의 파열은 곧 정치적 분열로 이어졌다. 서인 내부에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따르는 소론이 갈라서게 된 것이다. 회덕과 니산에서 벌어진 이 논쟁은 후대에 ‘회니시비’로 불리며, 서인 분당의 중요한 계기 가운데 하나로 기억된다.
이 시점부터 조선의 정치 문화는 점점 더 타협의 여지를 잃어 갔다. 다른 생각을 품은 사람을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태도가 공고해졌다. 결국 한쪽 진영이 정국을 장악한 뒤에도, 내부의 다른 목소리는 섬세한 논쟁의 상대가 아니라 배척해야 할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이런 흐름은 훗날 노론 중심의 일당 정치와 세도 정치로 이어지며, 조선 후기 정치가 유연성을 잃는 데 중요한 몫을 하게 된다.
역사는 거울이라고들 말한다. 거울을 외면하면 자신의 얼굴에 묻은 얼룩을 끝내 보지 못한다. 현재의 우리 정치와 조직, 인간관계에도 비슷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지 돌아보지 않는다면, 조선이 겪은 것과 같은 수모를 다른 이름으로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요즘 우리의 정치는 얼마나 다른가. 여야가 서로를 향해 던지는 말 속에는, 정책과 철학을 두고 하는 논쟁보다 “너는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더 자주 섞여 있다. 한 번 ‘편 가르기’의 선이 그어지고 나면, 상대의 말은 내용과 상관없이 기각된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숫자 싸움과 인신공격뿐이다. 조선이 학문과 정치를 함께 가라앉힌 방식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회사 안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본다. 어느 쪽 팀에 서느냐, 누구와 식사를 하느냐, 누구의 편으로 여겨지느냐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너무 쉽게 재단된다. 실수 한 번 하면 그 사람의 여러 해의 성과와 진심이 한 줄의 평가로 덮이기도 한다. “그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라는 말이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 위기 상황에서 한 번 뺀질거린 사람, 회식에 한 번 빠진 사람, 의견을 한 번 다르게 낸 사람에게 그 순간의 장면만 남고, 그 뒤의 시간은 제대로 기록되지 않는다.
조선의 당쟁은 사상과 명분의 언어를 빌렸지만, 결국 사람을 끝까지 보지 못한 정치였다. 오늘 우리가 사는 직장과 정치도,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을 ‘틀린 사람’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순간 같은 오류를 밟기 쉽다. 역사를 거울로 삼는다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내 주변의 누군가를 한 장면으로만 기억하지 않겠다는 작은 다짐에서 시작될지 모른다.
누군가의 실수와 선택을 두고 “병자년, 그대는 어디에 있었는가”라고 묻기 전에,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서서 무엇을 하려 하고 있는지 한 번 더 살펴보는 것. 당쟁의 시대를 살았던 선비들이 지키지 못했던 그 한 걸음을, 우리가 대신 내딛을 수 있다면, 역사는 조금 다른 결말을 허락해 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