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공화국 시절, 지방에서 변호사를 찾아간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전국에 변호사가 2천 명 남짓에 불과했고, 실제로 사무실을 열고 시민을 만나는 개업 변호사는 1천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서울에 몰려 있었으니, 군 단위나 작은 도시에서는 변호사를 직접 만나기보다 생활법률 책 한 권을 붙들고 일상적인 분쟁을 해결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평범한 사람의 눈높이에 맞춘 생활법률서는 지방에서 특히 더 절실한 책이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에는 서울변호사회와 서울제일변호사회가 따로 존재했다가, 1980년대 초를 지나면서 서울통합변호사회, 다시 서울지방변호사회로 이름이 정리된다. 정확한 연도별 통계는 남아 있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이후 통계를 보아도 서울 지역이 전체 변호사 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조는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진다. 이 흐름을 거꾸로 따라가 보면, 1980년경에도 ‘변호사는 서울에, 법률 수요는 전국에’라는 불균형이 이미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1915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고(故) 이항녕은 1940년 경성제국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고려대학교에서 법학을 가르쳤고, 1960년에는 문교부 차관을 지냈다. 1970년대에는 홍익대학교 총장을 맡아 대학을 이끌었고, 이후에는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의장, 사단법인 현정회 이사장, 한국뿌리 찾기 연합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통일 문제와 역사 인식 논의에 관여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일본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 하동군수와 창녕군수를 지낸 경력이 있는 인물로, 말년에 자신의 친일 행적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사과한 사례로도 알려져 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 대표를 지낸 이재후 변호사는 그의 아들(삼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