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만행(萬行)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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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겨울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책 사이에 끼워 둔 얇은 책갈피가 그대로였다. 종이는 누렇게 바랬지만, 그때 내 마음이 얼마나 추웠는지는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떠올랐다. 1999년 11월,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었다. 군 복무 중이던 나는 상병 7호봉 말이었다. 한 달만 지나면 병장을 다는 시기였고, 막연하게나마 ‘군 생활도 이제 끝이 보인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러던 중 작업 도중 허리를 심하게 다쳤고, 급히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됐다. 구급차 안에서 허리와 저릿한 다리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 떨고 있던 순간이 아직도 몸으로 기억된다.


입원한 지 한 달쯤 지나, 199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허리 수술을 받았다. 병명은 수핵탈출증, 흔히 말하는 디스크였다. 그 수술로 나는 의병전역 심사 대상이 되었다. 적어도 그때 내가 있던 부대에서는, 수술을 할 만큼 상태가 심각한 병사들은 자연스럽게 심사에 올라가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군에 남아 병장으로 만기 전역을 할지, 의병전역을 선택하고 빨리 복학을 할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뀌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뿐인데, 머릿속은 늘 불안으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만기 전역이 아니면 취업에 불리할 수 있다”라고 했고, 그 말이 귓가에 오래 남았다. 그 말을 믿으면서도, 정말 그런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결국 나는, 병원에서 남은 기간을 보내며 병장 계급장을 다는 것보다, 조금 더 빨리 학교로 돌아가는 쪽을 선택했다. 의병전역을 신청했고, 그 선택으로 내 군 생활은 상병에서 끝이 났다. 지금 돌아보면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그때는 ‘한 달만 더 있으면 병장인데’ 하는 아쉬움이 꽤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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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그 선택은 다른 얼굴을 갖게 되었다. 친구들보다 조금 이른 나이에 졸업을 했고, 자연스럽게 사회생활을 시작한 시기도 빨랐다. 결과적으로 또래들보다 경력이 몇 년 앞서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그 선택이 언제나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때의 나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나름 최선을 다해 결정했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추웠던 그 겨울, 군 병원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걱정으로 몸서리치던 시기에 원 부대 선임 한 분이 책 두 권을 가져다주었다. 현각 스님의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1·2권이었다. 군복 대신 환자복을 입고 누운 채, 그 책을 한 장씩 넘기며 참 많은 위로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원생이었던 저자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국으로 건너와 수행자가 되는 이야기는, 내 삶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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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책을 펼쳐 보니, 1999년에 끼워 둔 책갈피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오래된 종이 한 장이 그때의 병실과, 창밖의 어두운 운동장과, 침대 머리맡 형광등까지 함께 불러온다. 그 시절의 나는 국군수도병원 복도를 환자복 차림으로 천천히 걸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혼자 속으로만 묻곤 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그 시절을 떠올려도 더 이상 슬프거나 쓸쓸하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현각 스님이 말한 것처럼, 나도 모르게 순간순간 마음을 조금씩 열어 왔던 것 같다. 그때는 모든 것이 막막해 보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도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해 지나온 한 구간이었을 뿐이다.

오래된 책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지만, 책을 읽는 나는 그때와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그저 위로를 받기 위해 읽었다면, 이제는 “다시 용기를 내도 된다”는 말을 조용히 건네는 동료처럼 느껴진다.


“걷고 얘기하고 먹고 차를 마시고 사람을 만나고 시장에 가는 모든 것, 뺨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질주하는 차를 바라보는 것, 친구와 악수하며 감촉을 전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수행이며 만행이다.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는 모든 것, 이것이 바로 만행이다.”라고 현각스님이 깨우쳐 주셨다.


곧고 바른 것을 길이라 하고 두려움 없는 곳을 목적지라 한다고, 오래된 경전은 말한다. 고요한 수레에 올라 진실의 가르침을 덮개로 삼고, 부끄러움을 고삐로 삼고, 바른 생각과 지혜를 벗 삼아 생사의 숲을 지난다고 한다. 1999년 겨울 군 병원 침대에서 시작된 나의 길도, 어쩌면 그 수레의 한 자리를 빌려 타고 온 여정이었을지 모른다. 지금도 나는 그때처럼, 다만 하루하루를 걸으며 조금씩 마음을 여는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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