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두려운 것
나는 원래 겁이 많은 사람이야. 그렇다고 J는 겁이 없느냐고? 부부는 닮는 다고 하잖니. J도 엄청난 겁쟁이야. 우리가 얼마나 겁쟁이냐면, 한 밤 중에 깨어나 화장실을 가다가 스스로의 그림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주저앉는 쫄보가 바로 나다. J는 사람 그림자를 보고 놀라지는 않지만 벌레 그림자를 보고는 놀라. 그래서 집 안에 침입하는 온갖 벌레 퇴치는 나의 임무가 되었어. 문제는 없다. 나는 벌레를 싫어할지언정 무서워하지는 않거든. 그리고 벌레를 보고 놀라는 J의 표정이 얼마나 웃기는지… 너도 곧 알게 되겠지.
뭐니 뭐니 해도 요즘 가장 무서운 건 사람이겠지. 뉴스를 보면 나오는 온갖 무서운 범죄들이 사람에 의해 벌어진다는 것을 안다면 너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은 두려움을 느끼게 될 거야. 더욱이 네가 여자 아이라면… 아찔함이 느껴진다. 여자인 내가 살아온 세상이 그다지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내가 겁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었을까. 너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도 기쁜 가운데 두려움을 느끼고 말았어. 미안해. 하지만 두려움이란 건 내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 중 하나라고 생각해. 너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는 별개로 아이를 갖는다는 건 그리고 키워야 한다는 건 무섭고 겁나는 인생의 큰 사건이 분명하거든.
그 와중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부모가 될 준비가 되었을까, 하는 점이었어. 사실 나는 아직도 내가 미심쩍어. J에 대한 의심도 살짝 있다. J가 좋아하는 과자를 먹으면서 거실과 식탁에 이리저리 부스러기를 흘려놓고 치우지 않았을 때, 혹은 사용한 컵을 설거지통에 넣지 않고 자기 방 책상에 가득 쌓아두고 있을 때, 세탁기에 던져놓은 양말이 뒤집혀 있을 때 등등 말이지. 네가 태어나면 나는 네가 흘린 음식과 J가 흘린 과자 부스러기를 모두 치워야 하고 네가 쓴 그릇과 J가 쓴 컵을 한꺼번에 수거해야 하며 뒤집힌 양말 두 쌍과 씨름해야 할 것만 같거든.
물론 J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말을 하면 개선이 되기는 해. 그게 며칠 가지 못 하는 게 문제랄까. 그래도 우리는 나름 합의점을 찾았다(뒤집어진 양말은 그대로 세탁되어 J의 발에 안착하기도 하는 식으로). 하지만 너는 태어나서도 한 동안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걱정이 앞선다.
내가 그런 너를 충분히 이해하고 기다려 줄 수 있을까. 내가 그런 사람인가. 아니라면, 어리고 약한 너를 내 기분에 따라 닦달하고 괴롭게 하면 어떻게 하지. 나는 그런 나를 경멸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혹은 그런 나를 자제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많은 두려움 때문에 이제 와서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도 안 되고. 무엇보다 나는 정말 너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거든. 내가 이렇게까지 아이를 원하는 사람이었나, 의아함이 느껴질 정도였어. J도 조금 놀랄 정도였다. 왜냐하면 부모의 손을 잡고 길을 걷는 작은 아이를 보면 냅다 그 아이를 붙잡아 훔쳐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거든. 그 얘길 하니 J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어. 그러면 안 돼.
기가 막혀서. 정말 그러겠다는 게 아니잖아. J는 간혹 내가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를까 무서운 모양이지만.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알 수가 없다.
요즘 나는 나 자신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고 있어. 이걸 일종의 태교라고 해야 할지. 자기 계발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 조금 헷갈리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무서워하는 건 나의 어린 시절이 너의 어린 시절에 영향을 미치면 어쩌나 하는 점이었다.
나의 부모님을 통해 겪은 상처를 너에게 물려주게 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어. 그건 정말 내가 너에게 하지 말아야 하는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하거든.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아야 한다, 는 말은 너를 대하는 태도에도 통용되는 말이어야 한다고 생각해(물론 이상론이지. 육아를 시작하면서 얼마나 그 말을 지킬 수 있을까). 다만 나의 무의식이 가지고 있는 상처마저 내가 통제할 수 있을까?
나의 부모님은 아주 엄격한 분들이셨다. 나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무서워하고 어려워하는 아이였어. 부모님 또래의 어른들 앞에서는 내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는 아이였지. 나는 혹시라도 네가 그런 아이가 되길 바라지 않아. 버릇이 없는 것과 상대에 주눅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 나는 여전히 조금이라도 무섭고 어려워 보이는 상대에게는 늘 조심스럽고 속내를 잘 전하지 못하거든.
또한 부모님은 애정표현이 거의 없는 분들이었어. 그래서인지 나는 항상 의심해야 했어. 내가 사랑받고 있는지. 그리고 고민했지.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는지. 그래서 칭찬이나 인정에 집착했던 것 같아. 나는 아주 말을 잘 듣는 아이였고 그게 사랑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바보 같은 믿음이었단 건 어른이 되고도 한참 후에나 깨달을 수 있었어. 그 과정에서 얼마나 괴로운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는지는 다시 상기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나에게는 필요한 시간이었지. 다만 너에게는 그런 시간들이 필요하게끔 하고 싶지 않다는 게 나의 바람이야.
너에게도 그런 경험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너는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다는 걸 수시로 알려주고 싶어.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그런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야. 하지만 정말은 나중에 네가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된다면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너를 대하는 나의 말과 행동으로 이미 네가 사랑받는다는 걸 깊이 체득하고 있기를 바란다.
두려움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닐 거야.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사실 더 두려운 법이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사이코패스의 경우 오히려 두려움이나 공포심을 잘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남에게 가혹할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차라리 겁쟁이가 될지언정 남에게 가혹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 학대받은 아이가 커서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는 것처럼 혹은 괴롭힘 당한 후배가 나중에 선배가 되어 다시 후배를 괴롭히는 식의 대물림을 경계하고 싶은 거야.
그러려면 우선 내가 가진 두려움을 잘 이해하고 극복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지. 앞으로 만나게 될 너를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산만큼 남아 있을(대강 70까지는 그럭저럭 산다고 치면) 나 자신을 위해서.
나는 내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불평불만도 많고 화가 나거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을 맞닥뜨리면 아주 진상이 되기도 하는 사람이야. 그럼에도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너를 맞이하는 순간에 더욱 너를 사랑할 수 있도록. 나 스스로 좋은 내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도록.
엇, 나는 항상 벌레를 무서워하는 J가 조금 귀엽다. J는 자기 그림자에 혼자 놀라는 나를 보며 웃고...... 귀여워서 그러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