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폴 Nov 15. 2022

행선지를 알리는 사랑

- 허수경 시에 부쳐


1.

시작은 요즘 자주 생각하는 이 글로 해야겠다.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리라. ('근사하다'라는 칭찬의 취지가 거기에 있다. '근사'는 꽤 비슷한 상태를 가리킨다.)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이것은 장승리의 두 번째 시집 <무표정>에 수록돼 있는 시 '말'의 한 구절인데, 나는 이 한 문장 속에 담겨 있는 고통을 자주 생각한다.

-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중



누굴 왜 좋아하느냔 질문을 받으면 알랭 드 보통이 떠오른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그가 썼는데, 이 책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장장 한 권으로 쓴 소설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그 질문을 받거나 해보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놀라 생각에 잠다. 어떻게 답해야 정확한 마음을 보여줄 수 있나. '근사치'의 진심은 어떻게 발굴하는 것인가.


질문에 대한 답변이 말이 아니라 글이 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되는 바가 있다. 한마디로 끝낼 수 없는 마음의 부피와 질량, 아무리 길게 말해도 빠뜨리고 핵심은 글로 하는 지난한 첨삭을 통해서만 진심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허수경을 왜 좋아하느냐는 질문은 골몰보다 더 많은 집중이 필요한 주제였다. 당장 답하란 게 아니어서 당은 면했지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말고 살뜰히 소비해야 한다는 전제는 제대로 된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으로 작용했다. 알랭 드 보통처럼 한 권을 쓰지 못할 거면 한 편의 글에, 시인의 시와 더불어 산 날들을 다 풀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애초에 한 권의 함량을 가진 한 편이 되길 요구받은 것이라면, 날 전율하게 했던 문장들을 찾아 데려오는 것이 유효한 방법이 될 것이었다. 여기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까.



살아 있을 때 트라클에게는 이 지상이 가장 낯설고 무서운 곳이었다. 그는 살기를 거부했던 시인이었다. 태어나는 것이 이토록 무섭다는 것을 전생에서 이미 습득한 것처럼 짧게 살다가 갔다. 그의 시가 환기시킨 무참히 아름다운 어떤 순간들. 뮌스터 거리를 걷다가 지치면 벤치 한구석에 앉아 그의 시들을 읽다가 문득 삶이란 어떤 순간에도 낯설고 무시무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리. 그대들도 그러리라, 그대들의 도시에 살면서 존재는 시리고 비리리라. 마치 어시장의 고무 다라이 속에서 갑자기 어느 손에 잡혀 시장 바닥으로 던져진 혼자인 작은 졸복 한 마리처럼.

- <너 없이 걸었다> 중.


허수경 시의 끝없는 평야는 저마다 다른 계절을 가진 경치로 국경을 나눈다. 경계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역사, 삶, 그리고 사랑것이다. 오늘은 사랑을 탐험하는 모험가의 시선을 선택한다. 그 사랑은 이렇게 시작다, 시장 바닥에 던져진 졸복의 추락으로. 바다로 돌아가지도, 팔려가지도 못'혼자'가 누구의 눈에 띄기 전에 먼저 밟혀 격렬해진 펄떡임으로 제 존재를 증명하는 장면으로.


이 사랑이 어여쁘기만 한 사랑이 아닌 것은 어렵지 않게 예감할 수 있다. 그동안 세상이 아직 발견 못한 사랑을 보고 싶었지만 찾기 쉽지 않았다. 어쩌다 발견해도 편린에 지나지 않아 전체를 짐작하기 어려웠고. 세상 어떤 것의 대신도 될 수 있다는 말은 어디에도 고유한 자리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더 거대할 거란 예감을 배반한 적 없어 녹는 중인 빙산에 올라탄 사람을 끝내 뭍으로 돌아오게 다. 시집의 첫 장을 넘긴 사람에게만 허락된 여정이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 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 <폐병쟁이 내 사내>


내 사랑처럼 대단한 사랑을 당신도 해 봤나요, 라는 질문만큼 답이 일정한 질문은 없다. 세상 모든 사랑은 독자적이고 특수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쓰다듬고 싶어 하는 착각은 있다. 내 사랑이, 너의 사랑보다 무겁고 빛나는 것이라는 오해.


이 시를 읽으며 탄복한 건 그 오해가 사랑의 영속성에 이바지한 부분이었다. 우리의 오해가, 개인의 오만으로 끝나지 않고 사랑의 공터를 채우는 노래나 빛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말들이 거기 있었다. 그 말들은 사랑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쓰였다. 공터를 채우는 목소리를 옮겨 적은 글씨로. 그 말들에 잠긴 동안 나는 '허벅살 선지피'를 먹이는 갓스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피를 마시고 '끝내 일어섰'을, 사랑보다 지극한 정성으로 살고 싶어진 얼굴도.



2.

깊은 바다가 걸어왔네

나는 바다를 맞아 가득 잡으려 하네

손이 없네 손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손이 없어서 잡지 못하고 울려고 하네

눈이 없네

눈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고 싶다

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


글썽이고 싶네 검게 반짝이고 싶었네

그러나 아는 사람 집에 다, 다,

두고 왔네


- <바다가>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 손과 눈, 혀와 반짝임을 다 가져간 사람. 그 사람을 사랑이 아니면 뭐라 부를까. 이별을 맞닥뜨린 사람은 손이나 눈이 없는 것처럼, 혀나 반짝임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컴컴한 시간을 통과한다. 통과해야만 살게 되는 다른 세상이 있다. 그러나 굴 속을 지나는 동안은 내게 손이 없으니 내 손을 잡아줄 이가 없다. 혀가 없으니 세상의 맛이란 맛은 다 입에 들어오는 순간 사라진다.


남은 건 무엇인가. 아는 사람 집, 그 집만 남아있다. 내 모든 걸 가져가고도 겁 없어, 도망가지 않고 거기 계속 사는 사람. 나는 내 손과 혀가 어디 있는지 알지만 그 집 문을 두드려 돌려달란 말을 못 한다.


'바다'는 내가 아주 잃은 것들을 모른다. 내가 끝내 '안기지 못'한 바다는 결국 나에게 없는 것들만 절실히 확인시키는 존재다. 나에게 없는 걸 알아보고 돌아서는 존재다.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아오면, 잃은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서 있으면 바다는 다시 밀려올까. 시가 몰라서 답을 못 한 게 아니다. 답을 찾는 건 읽는 의 소임이 시의 입술은 침묵할 뿐.



그 꿈에서 깨어날 수 없네

낯선 기차에서 내리듯 그 꿈에서 내려올 수 없네

내가 내린다면 넌 혼자 그곳에 있을 것이므로


고름진 달과 허더벙한 갈빛이 일렁이는 꿈,

누군가 도시 해변에 앉아 둔벙살이 돋은 발뒤꿈치를 씻는 꿈


어제 막 태어난 별빛이 사금파리에 찔리는 꿈,

동천으로 동천으로 안개가 자망자망 걸어가는 꿈


- <동천으로>


달에서 고름을 보고 발뒤꿈치에서 둔벙살을 보는 것이 시인의 눈이다. 이때 별빛은 더 이상 희망과 이상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사금파리를 닮아 모서리가 많은 빛이다. 안개는 다리가 있어 제가 원하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갈빛은 허더벙해서 낙엽 쌓인 길처럼 일렁인다. 이 경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기차다. 너와 내가 함께 탄, '꿈'이라는 이름의 기차.

마침내 '너'가 나온 꿈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꿈인가. 깨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깨어나면 너 없는 현실만 기다릴 뿐이므로. 기차가 사라지면 별도 달도 안개도 꺼지고 말아, 너와 내가 함께 있는 시간도 사라지는 것을. 너 없는 동천에 가지 않으려 애를 쓰는 나는 너를 혼자 둘 수 없어 깨어나자마자 이 시를 쓴다. 아니, 종이에 꿈을 베낀다.



3.

시가 쓰이는 순간은 참으로 우연하게 온다. 삶을 통과하는 모든 순간은 우연과 우연으로 점철되기 때문이다. 매일 걷는 거리에서 어제는 보지 못했던 난민을 오늘 볼 때, 운전을 하고 가다가 갑자기 비둘기가 사이드미러를 때리고 지나가서 갓길에 차를 급정거해야 할 때... 등등의 수많은 우연의 순간에서 시는 나온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 알 수 없기에 한시라도 시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균열의 순간에 균열을 경험하지 못한다. 순간을 재구성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비슷한 순간을 시 언어로 만들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비슷하지 그 순간이 아니다. 균열을 감지할 때 온전히 경험을 해야 한다. 이것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 <시인이라는 고아> 중

 

삶의 고만고만함과 평온함을 내 안에 시가 부재하는 이유로 들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에게 형형한 몸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몸으로 온전히 경험하기 위해 필요한 건 특별한 삶의 순간이 아니라 어제와 같은 오늘 속에서 어제와 다른 점을 찾아내는 눈이다. 그 눈은 앞서 신형철이 말했던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맨 눈이다. 허수경의 시에서 그 눈을 본다.


어떤 독서는 여행보다 장대해서 독후감이 아니라 여행기를 써야 하는데 연모하는 시인의 일생을 따라가는 일이 바로 그렇다.



귤 한 알, 창틀 위에 놓아두고

병원엘 갔지


지난 가을에는 암종양이 가득 찬

위를 절개했다

그리고 겨울, 나는 귤 한 알이

먹고 싶었나 보다


귤 한 알

인공적으로 연명하는 나에게

귤은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그 작은 귤의 껍질을 깠다

코로 가져갔다


사계절이, 콧가를 스치며 지나갔다

향기만이.

향기만이.

그게 삶이라는 듯


- <가기 전에 쓰는 글들>


시를 좋아해서 냉장고에 붙여 두었다가 떼어낸 것은 귤 때문이었다. 나는 왜 향기만으로 충분히 삶을 겪고 사계절을 살지 못하나,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시인의 산문집과 시집, 시작 메모와 일기에 아무리 오래 머물러도 하루하루의 향기는 도저히 못 읽고 시어와 다음 시어 사이의 간극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인 나는, 마침내 행선지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에게 묻고 싶은 건 언제나 단 하나의 질문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지금, 어디 있나요?


마음에 단단한 뿌리를 내렸는지, 거기서 걸어나가는 중인지, 이쪽으로 뛰어오는 중인지, 안개처럼 도처에 깔려 있다 해 뜨면 스러질 작정인지.


사랑은 그녀가 말하고 싶어 했던 삶의 부분들 중 가장 의욕적이고 사무치는 부분일까. 심히 커서 다 말할 수 없었던 전부일까. 이 사랑의 일부를 살핀 것만으로 나는 사랑의 자리에 앉혀 놓을 장면들을 불러내지 않을 수 없었고, 내 사랑은 어디쯤 가고 있는지 호명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가려는 방향을 일러주려고 너만 알아들을 암어를 꺼낸다.


오늘 내 행선지는 허수경, 그녀를 왜 좋아하는지 묻는 질문에 온 힘을 다해 답하려고 도서관과 서점에서 몇 날을 서성이다 돌아오는 길이다. 이 시들은 우리 목적지로 가는 동안 추운 외투를 잠그는 단추가 될 것이다.




진샤와 폴폴이 시에 관한 모든, 뭐든 주고받습니다.


오전과 오후의 경계에 걸터앉아 가운데 놓인 지난날을 바라봤어요. 그건 참,

역력했어요.

우리가 들어 있어서.

매거진의 이전글 취, 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