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있어 다행이야, 희망은 그토록 가까이.
두 번째. 네가 있어 다행이야.
●○ 너에게 부치는 편지
안녕! 나는 방금 ‘우리 반 로고를 모집받습니다’ 칸에 ㅎㅇ이가 만든 로고를 붙여 넣었어. 마음에 들어서 자꾸 쳐다보게 돼. 자세히 보면 발견할 수 있는 2와 3과 음표가 네 덕분에 특별해졌어.
이번 주의 가장 큰 행사는 아무래도 학급임원선거였어. 나도 지난주 내내 궁금했거든.
ㅁㅎ이가 개표하며 호명하고 ㄱㅇ이가 칠판에 바를 정자를 그었어. 너는 칠판에 득표 숫자를 안 적으면 안 되냐고 물었어. 적은 표를 받은 친구가 상처받을까봐 네 따뜻한 마음에 걱정되었겠지. 나는 단호하게 말했어. “우리 후보들은 모두 추천받은 친구들이야. 일단 선거에 나선 것 자체가 대단한 거야. 전혀 부끄러울 일이 아니야.”
있잖아, 내가 예전부터 귀찮거나 두려울 때마다 스스로 되뇌는 말이 있어. ‘하는 만큼 얻는다’야. 누구나 주어진 일만 하는 게 편해. 더 움직이는 건 선택이야. 다만 더 행동한다면 경험이든 신뢰든 기회든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
각자는 각자의 세계에서 살아가. 그리고 내가 움직이는 만큼 나의 세계가 넓어져. 설령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언젠가 발판이 될 거야. 적어도 풍성한 추억거리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건 확실해. 내가 지금 믿고 의지하는 친구들은 귀찮음을 무릅쓰고 다녔던 모임에서 얻을 수 있었고, 내가 지금 이루고 싶은 꿈들은 대가 없는 봉사활동에서 얻을 수 있었고, 내가 지금 사랑하는 일들은 두렵지만 해보았던 나의 선택들에서 얻을 수 있었어.
우리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앞에 나와 연설한 ㅇㅈ이, ㄱㅇ이, ㄱㅎ이, ㅇㅎ, ㅅㅂ이, ㅎㄱ이가 정말 자랑스러워.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거 알아. 그만큼 너의 세계가 넓어졌을 거야. 많은 친구들의 신뢰를 얻은 ㄱㅎ이와 ㅅㅂ이도 축하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들 중 하나가 믿는 것, 그리고 믿음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해.
“개표를 도와줄 사람?”이라고 물었을 때 잔뜩 손을 들었던 네가 고마워. 모든 후보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했던 ㅁㅎ이도 기억에 남아. ‘임원에게 바라는 말’을 적어 투표에 참여한 우리 3반 모두와 손을 꼭 맞잡고 싶어.
우리 반에 네가 있어 다행이야. 자, 오늘도 무척 반가웠어!
●○ 나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이야기
어릴 때 받았던 문화 충격이 떠오른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곧 부모를 따라 스리랑카와 덴마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국에 돌아왔다. 우리 반 교실 뒤편에는 공용 연필깎이가 하나 설치되어 있었다.
여러 아이들이 멋대로 이용하다 보니 곧잘 고장이 나곤 했다. 보다 못한 담임선생이 안내문 하나를 써 붙였다.
“학급 물품을 내 것처럼 아끼자!” 이 문구를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그때까지 내가 외국에서 받은 교육에 의하면 그 문구는 응당 이렇게 쓰여 있어야 했다. “남의 것처럼 아끼자.”
‘내 것’이라면 다소 소홀히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남의 것’ 혹은 ‘우리 것’이라면 더 조심하고 아껴야 한다, 어린 나에겐 이것이 상식이었다. 혹시 잘못 써진 건가 눈을 씻고 살펴봤지만 아니었다. 과장이 아니라, 이 일은 어린 나에게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희였고 앞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며 겪을 일들에 대한 경고 신호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누군가 ‘내 새끼’라는 말을 쓸 때마다 이 일화를 떠올린다. 우리 사회가 ‘남의 새끼’도 귀하게 대했다면 지금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상상하면서. - 김한민, 『아무튼, 비건』 中
●○ 우리의 추천 노래들
3월 13일 수요일 오전, 나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오늘 하늘이 너무 예뻐! 블라인드 올리자!”라고 말했어. 우리는 우루루 창밖을 내다보았지. 보자마자 감탄스런 하늘은 아니었지만 함께 예쁜 구석을 찾았어. “구름이 움직여요!”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그 순간 구름이 걷히고 환한 햇살이 우리 반을 가득 비추었어. 기억 나?
내가 사랑하는 장면에 너와 함께 있어서 기뻐.
●○ 너와 읽고 싶은 시
3월 7일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 죽은 지 30년이 된 날이야. 머리 위에 고양이를 올려놓고 찍은 젊은 시인의 사진이 남아있어. 29년을 살았으니 너보다 딱 두 배를 살고 떠나버렸어. 네가 더 애틋하게 보고 싶어.
기억할 만한 지나침
-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네 번째. 희망은 그토록 가까이.
●○ 너에게 부치는 편지
안녕! 3월의 마지막 편지야. 때로는 시간보다 한참 앞서가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간을 허겁지겁 뒤쫓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간과 발맞추어가는 것 같기도 해. 너는 지금 어떤 시기를 살고 있니?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어서 요즘 너의 생활기록부를 찬찬히 읽고 있어. 내가 모르는 너의 이야기가 신기해. 가만히 따라가다가 ‘진로희망 없음’이라는 글자 앞에서 문득문득 시선이 멈춰. 어쩔 수 없이 아쉬워져. 진로희망은 매년마다 기록되는 것이고, 올해의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록해두면 미래의 너에게 도움이 될 텐데 말이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진로목표’가 아니라 ‘진로희망’이잖아. 목표가 ‘저 멀리 있는 확고한 도달점’이라면 희망은 ‘지금 여기’에 있는 거야. 내가 지금 여기에서 발견한 막연한 꿈, 그토록 가까이 있는 게 바로 희망이야. 목표를 성취한다고 하지만 희망을 성취한다고 하지는 않잖아. 단지 품으면 돼. 품다보면 닮게 될 테니까.
너의 생활기록부를 읽다가 오랜만에 나의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들췄어. 요즘엔 학생 진로희망만 적는데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학생 진로희망과 학부모 진로희망이 모두 기록되더라. 나는 나의 진로희망에 놀라. 교사라는 직업을 꽤 나중에야 정했다고 생각했거든.
학부모 진로희망의 진득한 한의사란 단어에 지금은 웃을 수 있어. 그 확고한 학부모 진로희망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교사가 되었구나, 놀랍기도 하고 조금은 안도감이 들기도 해.
그렇다고 교사라는 방향으로 줄곧 나아갔던 건 아니야. 나는 대학을 국어교육학과가 아닌 국어국문학과로 갔어. (수업 중에 말했다시피 국어교육학과는 중고등학교 국어 과목을 잘 가르치는 방법을 배우는 학과고, 국어국문학과는 우리나라 어법과 문학을 학문적으로 깊이 배우는 학과야.) 대학을 졸업한 후엔 교사와 전혀 다른 일을 했어. 심지어 먼 타국에서 살다 오기도 했지. 자주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고민했고, 몇 번의 갈림길을 만났고, 작고 큰 여러 번의 선택 끝에 나는 오늘 중학교 2학년 때 희망한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
그러나 나의 진로희망은 끝나지 않았어. 작가를 꿈꾸던 중학교 1학년의 시간이 내 속에 남아있거든. 나는 소설을 쓰고 싶어. 교사에 도달하기까지 직진이 아니었던 것처럼, 막연하지만 언젠가는 닮게 될 거라고 믿어. 곧게 뻗은 길은 아니겠지만 대신 더 다채로운 풍경을 볼 수 있겠지.
희망은 아무래도 ‘더 나은 나’, 적어도 ‘내가 바라는 나’일 테고 나는 우리 모두가 ‘내가 바라는 나’를 꿈꿨으면 좋겠어.
네 앞에는, 그리고 내 앞에는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자, 오늘도 무척 반가웠어!
●○ 추신
나는 지금 행복해. 국어 수업을 마치고 ㅈㅇ가 다가와 “『메밀꽃 필 무렵』을 읽고 있어요.”라고 얘기했을 때, 수업 시간에 잠깐 언급한 그 소설을 네가 기억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행복해. ㅇㅂ이, ㅇㅈ가 “운율이 잘 드러나는 노래예요”라며 추천한 방탄소년단의 <Young Forever>를 같이 듣는 시간이 행복해.
지금 돌이켜보면 진로희망을 ‘직업명’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로 생각해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 나는 아무래도 교사라서 행복한 게 아니라 너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는 사이라는 게 행복하거든. (물론 내가 좋아하는 건 국어 과목이지!) 내가 지금 진로희망을 쓴다면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는 사람’이라고 쓸 것 같아.
너는 무엇을 공유하고 싶니?
●○ 나의 자취방
너보다 딱 열 살이 많았던 나는 내 방에 하얀색 우드락을 붙이고 좋아하는 시를 매직으로 굵게 썼어. 좋아하는 시란 곧 닮고 싶은 시니까 잠을 자는 곳에 붙여놓고 싶었어. 내가 『빨강머리 앤』을 좋아한다고 했지? 앤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거든. “잠을 자는 곳은 꿈을 꾸는 곳이기도 해요. 방에 예쁜 것이 많으면 훨씬 더 멋진 꿈을 꿀 수 있잖아요.”
내 인생의 신조
- 로버트 풀검
나는 지식보다 상상력이 더 중요함을 믿는다.
신화가 역사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믿는다.
꿈이 현실보다 더 강력하며
희망이 항상 어려움을 극복해준다고 믿는다.
그리고 슬픔의 유일한 치료제는 웃음이며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걸 나는 믿는다.
여전히, 꿈이 현실보다 더 강력하며 희망이 항상 어려움을 극복해준다고 믿어.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걸 굳게 믿어.
그리고 나는 너에게 희망과 사랑을 느껴.
●○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한 책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잘 죽고 싶다고 대답한 적도 있다. 장래희망이 죽는 것이냐고 되묻는 사람에게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잘 죽고 싶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을 때만은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름엔 복숭아를 듬뿍 먹고 가을엔 사과를 양껏 먹을 수 있는 정도로 만족하며 살다가 양지바른 곳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황정은, 「낙하하다」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