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빌보드>(2017)
미국 남부 미주리 주 어느 시골 마을의 교외에 버려진 광고판 세 개가 있다. 어느 날 딸을 살해당한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먼드 분)가 광고판을 사 들여 다음과 같은 글자를 큼지막하게 새겨 넣는다.
"강간살인 당했다(Raped While Dying)"
"아직 못 잡았어?(Still No Arrests?)"
"왜죠? 윌로비 서장?(How Come? Chief Willoughby?)"
조용하던 마을은 발칵 뒤집힌다.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던 윌로비 서장(우디 해럴슨 분)에 동정하는 마을 사람들은 광고판을 철거할 것을 밀드레드에게 종용하고, 이를 완강히 거부하는 밀드레드는 마을 사람들, 특히 윌로비를 존경하는 차별주의자 경찰 딕슨(샘 록웰 분)과 사사건건 충돌한다.
<쓰리 빌보드>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셰이프 오브 워터>와 함께 트럼프 시대를 상징하는 영화로 주목을 모았다. 개인적으로는 <쓰리 빌보드>가 <셰이프 오브 워터>보다 몇 가지 측면에서 더 나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가 냉전시대의 단순한 선악이분법 세계관을 견지하며 분열을 전제로 하고 있는 반면, <쓰리 빌보드>는 그러한 이분법으로는 가를 수 없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주인공인 밀드레드가 완전한 선도 아니고, 그녀의 대척점에 있는 딕슨이 완전한 악도 아니다. 처음에는 딸을 잃은 밀드레드에게 공감하던 관객들도 치과 의사의 손가락을 드릴로 뚫어버리고, 암 투병 중인 경찰서장을 정신적으로 압박하고, 경찰서에 방화하는 테러까지 저지르는 그녀가 정의라는 생각은 버리게 된다. 반면에 처음에는 인종차별에 성차별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폭력적이고 비열한 인간으로 그려지던 딕슨은 후반부에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의 공감을 얻게 된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된 주제,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는다." 이 말이야말로 나는 트럼프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해답이라 생각한다. 트럼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트럼프에 대한 분노를 너무나 직접적으로, 그리고 격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분노는 결과적으로 트럼프 지지자들의 더 큰 분노를 야기하며 트럼프를 결집시키는 효과를 낳고 말았다. 트럼프에 대한 분노가 오히려 트럼프의 확고한 지지기반이 되고 있는 역설적 상황이 트럼프 대통령을 탄생시켰다는 역설이 여기 있다.
"경찰은 흑인들을 괴롭히느라 바빠서 범인을 잡을 시간이 없나봐요."
하지만 이 영화를 전적으로 긍정하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있다. 경찰을 비판하는 광고판을 설치한 직후,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밀드레드는 이렇게 말하며 경찰을 비판한다.
"경찰은 흑인들을 괴롭히느라 바빠서 범인을 잡을 시간이 없나봐요."
딸을 죽인 범인을 잡지 못 하는 무능과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동시에 비판하는 말이다. 이 대사가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밀드레드의 사고와 행동은 오로지 딸을 잃은 분노를 중심으로 하여 돌아가고 있는데, 굳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발언을 집어넣는 것은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참고로 밀드레드는 범인에 대해 남자라는 것 외에는 모른다. 인종에 대해서 모르는 이상 범인이 흑인일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는 사람이 느끼는 적의는 한편으로는 경찰을 비롯한 공적 기관을 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는 다른 인종, 민족, 성별을 향하기도 한다. 자신과는 다른 인종, 민족, 성별을 잠재적 범죄자로 느끼는 피해의식은 타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로 이어진다. <시사인>에 따르면 한국사회에서 난민에 대해 반감을 느끼는 사람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다고 한다.
흑인을 포함해서 모든 남자들을 잠재적 범인으로 생각해도 이상할 것 없는 밀드레드가 유독 흑인들에 대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밀드레드를 흑인에 우호적인 백인으로 그림으로써 영화는 '피해자 유족 vs. 경찰'이라는 대립구도를 '민주당 vs. 공화당' 내지는 '진보 vs. 보수'라는 정파적 대립구도로 덧씌운다. 이러한 정파적 대립구도가 주제를 호도하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이 영화에서 걸리는 부분은 딕슨이라는 인물이다. 영화의 두 중심인물인 밀드레드와 딕슨은 성장을 경험하지만, 특히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인물은 딕슨이다. 인종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인물로만 그려지던 딕슨이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서 보여준 영웅적 행동은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되살린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그런데 딕슨을 보며 떠오르는 영화 속 인물이 있다. 78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폴 해기스 감독의 <크래쉬>(2004)에 나오는 라이언(맷 딜런 분)이다. <크래쉬>는 LA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군상극인데, 라이언은 그 중에서도 악질적인 인종차별 경찰이다. 교통단속에서 유색인종의 차를 멈춰 세워 타고 있던 여성을 성추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크래쉬>의 딕슨과 비슷하게 저열한 인간이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유색인종 여성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며 개과천선을 보인다는 점에서도 딕슨과 비슷하다. 개인사로 늙고 병든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는 점 역시 비슷하다. 이쯤 되면 평행이론이다.
문제는 딕슨과 가까운 실존인물이다. 인종차별적이고, 폭력적이고, 막말을 일삼고, 단순하고, 멍청하고, 어디로 튈 지 모르지만, 웃기고,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 그렇다. 나는 딕슨을 보며 도널드 트럼프를 떠올렸다(<바이스>에서 샘 록웰은 부시를 연기했지만 나는 트럼프가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쓰리 빌보드>가 트럼프 시대의 미국사회를 그려내고 있다면 딕슨이야말로 트럼프, 혹은 트럼프 지지자들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미국 남부를 "딕시(Dixie)"라고 부르는데 그 어원은 딕슨이라는 사람의 이름이라고 한다.
어쩌면 감독은 딕슨을 통해 트럼프가, 혹은 트럼프 지지자들이 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는다"는 말에서 교훈을 얻은 밀드레드처럼 민주당 지지자나 진보파가 딕슨을 포용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딕슨이라는 인물을 끝까지 긍정하기 어려웠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나 역시 사람은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혐오발언을 일삼는 인종차별주의자에게서 변화의 가능성을 굳이 발견해야 할까?
어려운 질문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