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조직에 대한 충성이 민주주의를 지킨다

<백악관을 무너뜨린 사나이>(2017)

by 김현욱

한국에서(어쩌면 미국에서도) "마크 펠트"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지간한 오타쿠가 아니고서야 50여 년 전 FBI의 부국장 이름을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마크 펠트의 또 다른 이름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딥 스로트(deep throat)"다.


197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대한 닉슨 측의 도청 의혹에 관해 취재하던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FBI 내부로부터 놀랄 만한 정보를 얻어 특종으로 보도한다. 바로 도청 의혹에 대한 FBI의 수사를 백악관에서 방해했다는 사실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익명의 정보원에게 당시 화제가 되었던 포르노 영화 제목에서 따온 "딥스로트"라는 이름을 명명한다. 마크 펠트가 자신이 딥스로트였음을 공언하고 우드워드가 이를 인정한 것은 2005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였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내부고발자 "딥스로트"는 정권의 의혹의 대명사가 된 "워터게이트"와 마찬가지로 보통명사처럼 쓰이게 된다.


최근 한국에서 화제가 된 "토요일 밤의 학살(Saturday Night Massacre)"은 이듬해 10월 20일에 벌어진다. 워터게이트 의혹과 관련한 끈질긴 수사에 위기를 느낀 닉슨은 눈엣가시와 같은 콕스 특검을 해임하도록 리처드슨 법무장관에게 명한다. 리처드슨은 이를 거부하고 법무장관을 사임한다. 장관 대리가 된 법무차관 란케르즈하우스에게 해임을 명하자 법무차관 역시 이를 거부하고 사임한다. 결국 법무부 서열 3위였던 보크 법무차관보가 콕스 특검을 해임한 사건이 바로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미국 사회의 여론은 닉슨에게 등을 돌린다. 정권의 의혹을 수사 중인 특검은 물론, 특검의 해임을 거부한 법무장관과 법무차관까지 하룻밤에 물러나게 한 것을 보고 "해도해도 너무한다" "뭔가가 있긴 있구나"라고 느낀 사람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법무장관, 법무차관을 대신해 특검을 해임한 보크 법무차관보는 훗날 레이건 정부 시대에 연방대법관으로 지명되지만, 의회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낙마한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 "딥스로트"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왔다. 리암 니슨이 주연을 맡은 <백악관을 무너뜨린 사나이>다. 사실 <더 포스트>와 비교했을 때, 영화 자체를 잘 만들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스토리는 단조롭고 연출도 평이하다.


하지만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인 실화를 영화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재미가 있다. 특히 영화의 중심이 되는 인물 마크 펠트의 이야기는 리암 니슨의 연기와 맞물려 충분히 매력적이다.

영화는 마크 펠트가 얼마나 FBI에 대해 헌신적인 인물이고 원칙을 중시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던 어느 날 FBI의 국장으로 군림해 왔던 에드거 후버가 죽으면서 펠트의 운명은 전환을 맞이한다. 펠트는 내심 국장으로의 승진을 기대하지만 닉슨의 충복인 그레이라는 인물이 낙하산으로 내려온다. FBI 내부의 친닉슨파가 아니라 말 그대로 FBI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내려온 낙하산이다. 그따위 FBI 그만두라는 아내에게 펠트는 신임 국장이 자리 잡을 때까지만 있겠다고 말한다. 그런 가운데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진다.


"딥스로트"에 대해 닉슨 정권의 폭거에 분연히 들고일어난 정의의 사도일 것이라고 막연히 상상했던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과연 마크 펠트의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헌법에 대한 충성? 조직에 대한 충성? 인사에서 물 먹은 원한? 낙하산 그레이와 닉슨에 대한 불만? 민주당에 대한 정파적 지지?


헌법에 대한 충성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영화에선 마크 펠트가 좌익운동에 투신한 딸을 찾기 위해 FBI의 힘을 불법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실제로 마크 펠트는 1976년 FBI 시절의 불법 행위로 인해 유죄를 선고받는다. 직권남용이라는 측면에서 마크 펠트와 닉슨은 다를 바 없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마크 펠트의 동기는 조직에 대한 충성에 가깝다. 펠트는 후버 국장 밑에서 누구보다 FBI를 사랑했고, 자신이 평생을 헌신해 온 조직을 닉슨 정권과 낙하산이 엉망으로 만드는 것을 참기 어려웠던 것이다. 조직에 대한 충성이 닉슨 정권을 무너뜨렸다고 영화는 역설적으로 말한다.


워터게이트를 정의와 악의 대결로 이해한다면 영화 속에서 밝혀지는 마크 펠트의 실체에 실망할 수도 있다. 과연 워터게이트는 무엇이었는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트린 닉슨을 하야시킨 쾌거인가? 인사에 불만을 가진 FBI 부국장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희생된 사건인가? FBI 내부의 암투에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이용당한 사건인가?


닉슨은 억울한 희생양이라고 생각하기엔 거부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FBI의 수사에 대한 백악관의 개입은 잘못된 일이고, 동기야 어쨌든 마크 펠트가 이를 언론에 유출한 것은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옳은 일이 아니었을까? 내부고발이나 공익제보가 오로지 '순수한' 동기만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물론 조직에 대한 충성이 항상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조직에 대한 충성은 조직의 잘못에 관대 해지는 조직이기주의에 빠지기 쉽다. 더구나 FBI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국가기관이 민주적 통제를 벗어나 폭주할 경우의 위험성은 심각하다. 악명높은 후버 국장 시대의 FBI나 영화 속 마크 펠트의 위법 행위를 봐도 그렇다. 과연 영화 속의 마크 펠트가 어디까지 정당화할 수 있을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keyword
이전 04화워터게이트가 지금 터졌더라면